와우 아파트 붕괴사고
1970년대 건물 관련 참사로는 대연각 화재사건와 함께 쌍벽을 이루는 사건으로 안전불감증의 효시이기도 하다.
1970년 4월 8일에 서울특별시 마포구 창전2동에 위치한 와우아파트 15동이 무너진 사고이다.
당시 서울은 경제성장으로 인해 전국에서 일자리를 찾아 몰려든 사람들로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었으나 그에 비해 주택 상황은 열악하기 짝이 없었다. 이 때문에 소위 판자촌이라 불리는 무허가 건축물들이 기하급수로 불어나고 있는 상태였다.
이를 좋지 않게 본 박정희 대통령은 판자촌 정리를 명령했고 박대통령의 충복인 당시 김현옥 서울특별시장의 지시로 각 구청 별로 판자촌 등의 무허가 건축물의 현황을 파악한 후 대부분의 판자촌들을 철거하고 시민아파트들을 짓게 했다. 이에 따라 지어지게 된 시민아파트 중의 하나가 바로 이 와우아파트였다. 그래서 아파트를 지은 곳은 대부분이 산중턱. 왜 저런 곳에 아파트를 지었냐는 질문에 대한 김현옥 시장의 답변도 유명하다. "야 이 새X들아. 높은 곳에 지어야 청와대에서 잘 보일 것 아냐!" 와우아파트의 위치는 현재의 홍대 뒷산인 와우산이니 중턱도 아니고 완전 산꼭대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정해진 기간 안에 아파트를 뚝딱 지어내야 하는 상황인 데다가 턱없이 낮은 원가에다가 그나마도 중간에서 업체들과 공무원들이 떼먹는 경우가 빈번했기 때문에 와우 아파트를 비롯한 각종 시민아파트는 초날림으로 지어지게 되었다.
와우 아파트는 몇 개의 건설업체가 나누어 지었는데 이 중 13~16동은 (주)대룡건설이라는 업체에서 맡았다. 대룡건설은 이걸 박영배라는 업자에게 하청을 주었는데 문제는 이 사람이 무면허 업자였다는 것. 거기에 공사비는 1동에 1100만원 정도로 5층짜리 아파트 한 동을 제대로 짓기에는 부족한 금액이었다. 여기에 하청을 주는 과정에서 한 동당 125만원씩 떼먹었으니 공사비는 더욱 부족해질 수밖에 없었다. 당시 신진 코로나나 현대 코티나같은 자동차가 100만 원 하던 시절이니 지금으로 따지면 몇 억 주고 아파트 단지를 지으라는 셈이다.
또한 시민아파트의 기본 설계도 문제였다. 당시 서울특별시는 기존에 거주하던 빈민층의 생활수준을 고려하여 1㎡당 280kg 정도의 하중을 견딜 수 있어야 한다는 설계 기준을 제시하였다. 문제는 브로커들의 개입 등으로 입주권 가격이 크게 올랐고 이로 인해 빈민층은 도저히 입주금을 낼 만한 형편이 안되자 입주권 소위 딱지를 팔고 떠나는 경우가 태반이었던 것이다. 때문에 실제 아파트에 입주한 건 대부분 중산층들이였다. 이들이 무거운 가구와 많은 세간살이를 들여놓으면서 시민아파트에 걸린 실제 하중은 1㎡당 900kg 내외로 설계 기준의 3배를 넘었다.
결국 설계도 부실하고 공사비도 부족한 데다 업자도 무면허니 엄청난 날림공사가 진행되었다. 철근 70개를 써야 할 기둥에 고작 철근 5개를 쓰고 만들었으니 말 다한 셈. 콘크리트 강도도 크게 떨어졌는데 시멘트 함량이 적어 자갈 섞인 모래 반죽이나 다름없었고 콘크리트 만들 때 쓰는 물은 불순물이 엄청나게 많은 하수도 물을 사용했다고 한다.
거기다가 고작 6개월만에 아파트를 완성하느라 건축물을 세우는 데 필수적인 지반 공사를 전혀 하지 않았다. 1~2층짜리 가건물 같은 걸 세우는 게 아닌 이상 건물을 지을 때는 올리는 만큼 밑으로 파야 한다. 즉, 어느 정도 땅을 파서 기반을 보강한 후 그러고 나서 건물을 올리는 것이 건물을 짓는 정석인데 애초에 건물을 어떻게 짓는 지조차 모르는 작자들이 건설을 맡았으니 어떻게 될지 뻔할 뻔자인 것.
이러한 탓에 와우 아파트의 기둥은 암반이 아닌 부토 위에 세워졌으며 겨울 동안에는 땅이 얼어있었기 때문에 겨우 버텼지만 땅이 녹는 봄철이 되면서 결국 기둥이 하중을 이기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다.
와우아파트는 1969년 12월 26일에 완공되어 그때부터 입주가 시작되었는데 그때부터 문제의 업자가 시공한 13~16동에는 금이 가 있었다고 한다. 특히 14동은 콘크리트 받침기둥이 떨어지는 사고가 일어나 붕괴시점에는 주민이 대피한 상태였다. 해빙기가 되면서 땅이 녹자 지반이 내려앉으면서 기둥도 내려앉고 아파트가 산 아래로 넘어가듯이 무너져 내리면서 아래에 있던 판자집 세 채를 덮치는 바람에 이 사고로 인해 사망 33명, 부상 40명의 큰 인명피해를 냈다. 그나마 이 시점이 30세대 중 15세대만 입주가 이루어진 상태여서 이 정도지 만약 모든 세대가 입주해 있었으면 사상자가 크게 늘었을 것이다.
결과
이 사고로 '불도저'라고 불리던 김현옥 서울시장은 사직했고 관련자들이 무더기로 구속되었다.
박정희 시대 고도 경제성장에 구성원 의식이 따라가지 못 한 문화지체현상과 당시 만연했던 비리가 제대로 드러난 사고였지만 이를 두고 정부를 비판하는 것은 용납되지 않았다. 당대 최고의 신인 가수였던 조영남은 한 공연에서 유명한 신고산 타령 속 대사인 '신고산이 우르르르 함흥차가는 소리에'를 '우르르르 아파트 무너지는 소리에'라고 와우아파트 붕괴 사고를 비꼬는 노래를 불렀다가 무대에서 내려오자마자 "도망가라 서울시 공무원들이 널 찾는다"는 말을 듣고 고향으로 튀었으나 충청도까지 쫓아온 형사들에게 잡혀 강제 군입대를 당하기도 했다.
붕괴 직후 건축을 전공하는 서독 대학원생들이 사고 원인을 분석하려고 시도했는데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고 돌아갔다고 한다. 아파트는커녕 농가 헛간을 짓기에도 턱없이 모자란 자재로 어떻게 아파트를 지었는지 도무지 이해를 못해서라고 한다. 제대로 나라망신을 당한 사례.
붕괴 이후 와우아파트
15동 붕괴가 일어난 지 이레 후 문제의 시공업자가 시공한 13, 14, 16동도 철거가 이루어졌다. 콘크리트 질이 너무 떨어져 철거하는 데도 애먹었다고 한다.
와우아파트는 총 19개동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남아 있던 15개 동은 붕괴 이후에도 어느 정도의 보강 이후 계속 사람이 살고 있었다. 이후 1976년과 1984년, 1988년, 1989년 네 차례에 걸쳐 차례로 철거되고 1991년까지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4개 동(3, 4, 5, 가)도 결국 철거되고 터는 공원으로 조성되었다.
사고 이후 시민아파트
이 사고 이후 아직 건설되지 않은 시민아파트는 건설 계획이 모두 폐기되었고 짓고 있던 시민아파트는 골조를 더 보강해서 완성되었다. 사고 이후 시민아파트는 434동이 완공된 상태였는데 안전도를 검사하자 무려 349동이 보수가 필요하다는 결과가 나왔다. 결국 쓸 만한 아파트는 계속 보수해서 쓰고 못 쓸 정도가 된 아파트는 하나하나 철거하기 시작했다.
2012년 기준 서울 시내 대부분의 시민아파트가 철거되고 남아있는 것은 소월로 근처의 회현시민아파트 한 동뿐이다. 무한도전 '여드름 브레이크' 특집 초반의 바로 그 아파트. 와우아파트 붕괴 사고 이후에 준공된 아파트라서 시민아파트답지 않게 골조가 튼튼하다고 하다. 몇 년 전부터 재건축이 논의되고 있는 상황.
아무튼 이 사고로 인해 아파트에 대한 불신감이 팽배해지자 이에 정부는 시범아파트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중산층을 겨냥한 새로운 형태의 아파트를 짓게 된다. 더 높고 더 쾌적하고 안전한 아파트를 목표로 한 것. 이에 여의도를 시작으로 시범 아파트들이 성공적으로 세워졌고 이것이 지금의 아파트의 전형이 된다. 그렇기에 와우 아파트 붕괴사고는 대한민국 주거 역사에서 중요한 사고 중 하나다.
여담
조성한 와우공원은 현재의 홍익대학교 뒷편에 바로 위치하고 있다. 테니스 코트나 각종 헬스기구도 있고 밤마다 사람들이 운동하러 오는 좋은 근린시설이지만 와우산과 바로 맞붙어 있는 홍익대 시설물들(C동, I동, P동 등)에서 가끔 귀신 목격담이 나오는 등 일종의 심령현상 스팟이 된 모양이다. 너무나 어이없는 사고 전말을 생각해 보면 이해할 만 하다.
이 사고 이후로도 대한민국의 건설업계는 그닥 개선되지 않다가, 결국 1990년대 다리가 무너지고, 백화점이 무너지면서 정점을 찍고 말았다. 이 때문에 한국 뿐만이 아니라 국제적으로 대한민국 건설사들의 신뢰도가 크게 추락하였으며 이를 회복한 것은 2000년대 중후반이 되어서였다.
1980년대 반공서적에 의하면 북한에서는 철근 대신에 싸리나무를 써서 공법하기 때문에 70년대 아파트 붕괴사고가 나서 많은 사람이 죽었다라는 서술이 있는데 당시 정부에서 고의적으로 유포한 낭설에 가깝다. 이 때까지는 남북한 간 체제 경쟁이 계속되던 때였으니...물론 90년대 이후 경제력이 악화된 북한에서 부실공사가 성행하는건 맞으며 2014년 결국 일이 터졌다.
최일구 앵커가 와우아파트에서 살았었다고 무릎팍도사에서 이야기한 적이 있다. 안성에서 서울로 이사갔던 당시에는 이미 와우아파트 붕괴사고가 일어난 후였지만, 어린이의 눈으로 보기에도 당시 상황이 꽤 참혹했던 모양. 이 때의 기억 때문에 MBC의 기자가 된 후 "부실공사"라면 눈에 불을 켜고 찾아다니게 되었다고 한다. 이 인연이었는지 최일구는 MBC에서 한강 교량의 보수관리 실태를 취재하게 되었고, 보도한 지 1년 후 실제로 성수대교가 무너졌다. 최일구 앵커는 성수대교 붕괴 이후 당산철교의 균열을 발견하여 당산철교로 올라가 직접 촬영하였고, 결국 안전검사에서 딱 걸린 당산철교는 5호선의 개통과 함께 철거 후 재시공 결정이 내려졌다. 그리고 당산철교는 1997년에 철거 작업을 하다가 기존 교량이 알아서 무너진 후 1999년에 다시 완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