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수라 몸무게 강제인증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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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라 몸무게 강제인증 사건


2020. 10. 9.


정수라는 80년대 중반 나미, 이선희와 함께 여성 트로이카로 불렸던 80년대를 상징하는 여가수 중 한명 이었다.

1963년 12월 13일(음력 10월 28일) 서울특별시 출생. 초등학교 5학년 때인 1974년, 한국일보가 주최하는 제1회 한국가요제에서 함중아 작곡의 '종소리'를 불러 인기상을 수상하면서 가수로 데뷔했다. 주로 CM송이나 만화영화 주제가 등에서 얼굴없는 가수로 활동하다가 성인이 된 후인 1982년에, '그런 사람이 나는 좋아'로 본격적으로 가수활동을 시작했다.

그 후 1983년에, 앨범에 수록된 건전가요 '아! 대한민국'이 크게 인기를 끌면서 일약 스타덤에 올라 전성기를 이루게 되었다. 이후에도 '도시의 거리'(1985), '난 너에게'(1986), '환희'(1988) 등을 히트시켜 80년대를 상징하는 여자 가수 중 한 명으로 자리잡았다.

'아! 대한민국'은 그녀에게 가요톱텐에서 골든컵을 수여해 준 대표곡이지만 한편으로는 그녀의 흑역사다. 1983년에 '아! 대한민국'으로 KBS, MBC에서 여자 신인 가수상을 받고 스타덤에 올랐지만, '아! 대한민국'이 그 당시에 제2의 애국가라고 불릴 정도로 전두환 정권의 체제 홍보용으로 널리 쓰이면서 "어용 가수", "관제 가수" 소리를 할 정도로 정수라를 곱게 보지 않았던 시선도 존재했던 것이다. 1986년 아시안게임 때는 경기가 끝나면 정수라가 부른 '아! 대한민국'이 지겹도록 나왔고, 정수라 자신이 잠실종합운동장에서 노래를 부른 적이 있었다.

참고로 당시는 독재정권의 시책에 따라 앨범 마지막 트랙에는 항상 건전가요를 한 곡 이상 실어야 했다. 이러한 건전가요 정책은 1987년까지 지속되었으며, 신해철은 1996년 윤상과 함께 발매한 '노땐스 골든힛트 일집'에서 맨 마지막 트랙을 "시장에 가면(참 건전한 가요)"이라고 써 놓고 플레이타임을 0분 00초(=즉 실제로는 수록하지 않음)로 적어놓음으로써 그 시절 건전가요 강제수록 정책을 비꼬았다.

1988년에 '환희'를 히트시킨 이후에는 TV활동을 자제했고 미국 진출을 계획해서 미국으로 떠나 마이클 잭슨의 형인 저메인 잭슨과 듀엣으로 노래를 불렀으나 큰 성과를 얻지 못했다. 그 뒤에는 오랜 공백기로 인해서 당시 그녀의 나이와 맞물려 재벌 총수의 아들을 몰래 낳아 5백억 원을 받았다는 등의 악성 루머에 시달렸고 스타일의 변화로 인해서 히트를 못 치다가 1992년에 서태지와 아이들의 등장으로 가요계가 재편성되면서 주류 가요계에서 밀려났다.

나중에 언론을 통해서 적극적으로 이를 해명했다. 당시는 인터넷 같은 게 없던 시절이기 때문에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유언비어급 헛소문이 많이 돌았다. 심지어 멀쩡하게 잘 살고 있던 유명 배우(고두심, 노주현 등)의 사망설이 열흘에서 한 달 넘게 회자되기도 하고, 정말 가관인 것으로는 서태지 여장설에 임신설까지 있을 정도였다. 결국, 대부분 출처없는 소문으로 일부는 연예 기자 등에 의해 악의적으로 부풀려졌다. 이런 루머들 때문에 이지연이나 이상은은 연예계에 환멸을 느끼면서 아예 가요계를 떠나서 은퇴를 하거나 대중적 인기를 배제한 뮤지션의 길을 가게 되었다.

참고로, 1992년에 '오늘 같은 밤이면'으로 인기몰이를 하고 있던 박정운과 듀엣으로 잭슨파이브의 'I`ll Be There'를 불러 가창력을 뽐낸 적이 있다.



결혼

정수라는 2005년 변진섭의 소개로 사업가 장모 씨를 만나게 되었고 이듬해인 2006년 결혼했다.

그녀가 결혼을 늦게 한 이유는 한 집안의 가장이었기 때문이다. 홀어머니와 언니까지 셋이 함께 살면서, 어릴 때부터 실질적인 가장 노릇을 했다고 한다. 정수라 본인의 말로는 "내가 웨딩드레스를 입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고 한다. 장애인인 언니를 먹여 살려야 한다는 의무감에, 자신은 평생 결혼을 안 하고 살게 될 줄 알았다는 것이다.

그녀는 결혼 이후 남편에 대해 "저는 남편이 힘들고 지친 나를 구제해줬다고 말해요. 제가 가수로 데뷔한 뒤 20년 이상 쉼 없이 달려오는 동안, 사실 행복하지만은 않았어요. 가수 일 외에도 끊임없이 떠도는 루머 때문에 상처를 받고 고통도 겪었고요. 남편은 그런 저에게 안식처가 돼줬어요" 라고 말했다.

하지만 남편 장 씨는 한때 중견 규모의 민자역사 운영과 부동산업 등을 주업으로 하는 건설사 대표이사직을 맡았으나,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어음 배서란에 대표이사 서명을 해 5억 5000만 원을 편취한 혐의를 받고 구속된 바도 있었다. 남편 장 씨의 사업실패와 여러 가정적 이유 등으로 2013년 이혼했다. 이러한 사실은 2015년 복면가왕으로 재조명을 받은 이후 언론을 통해 알려지게 되었다.



최근 활동

2009년 자신의 밴드인 '정수라밴드'를 조직한 다음 17집 앨범을 출시했다. 이후 방송활동을 병행하며 자신의 기존 히트곡들도 보다 록 스타일이 가미된 편곡을 하여 선보이고 있다. 가장 최근의 신보는 앨범은 2012년 발매한 '사랑을 다시 한 번'이지만, 디지털 싱글은 2017년에 싱글 '어느날 문득'이다. 그리고 틈틈이 설운도와의 싱글 콜라보를 발매하는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다방면의 활동을 하고 있다.

가끔 지방자치단체 축제 행사까지도 뛰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선희와 마찬가지로 자기 관리가 매우 철저하여 50대 중반임에도 불구하고 전성기 때와 거의 달라지지 않은 가창력과 화끈한 무대매너를 매번 보여주고 있다. 게다가 일세를 풍미했던 가수답게 30대 이상 연령층에게 인지도가 매우 높아서 일단 무대를 뛰었다 하면 공연 분위기는 무조건 달리게 된다.

방송은 주로 KBS 콘서트 7080이나 지방 MBC의 가요 콘서트 등의 단골 손님인데, 별스럽게도 KBS 가요무대에도 등장한 적이 있어서 올드팬들에게 "아니 정수라가 벌써 가요무대 라인업에 설 나이란 말이야?"라며 충공깽을 선사한 적이 있다. 그리고 여기서도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과 함께 달렸다.

1990년대 이후는 방송출연을 잘 하지 않았기 때문에 90년대 이후 태어난 젊은층에게는 생소한 가수로 인식되는데, 복면가왕에 출연한 것과 응답하라 1988의 유동룡이 춤추는 부분 때문에 존재를 알게 된 뉴비들도 있는 듯하다.



복면가왕

2015.7.19 MBC 복면가왕 준결승전에서 하루 세번 치카치카라는 가명으로 참가해 카니발의 '거위의 꿈'을 불렀다.



제명 논란

1984년 4월 28일, 당시 한국연예인협회의 회장 이상우는 정수라에 대한 협회에서의 제명 처분을 논의했다. 그 이유는 정수라가 4월 26일에 구로공단의 공설운동장에서 가난 때문에 결혼식을 올리지 못한 노인들의 합동 결혼식의 축가를 부르기로 예정되어 있었는데, 민정당의 국회의원이 주관한 이 결혼식에 정수라가 불참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몸무게 강제 인증사건

정수라는 꽃돼지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통통한 가수'로 친근한 이미지를 얻고 있었는데 1989년 MBC 생방송 프로그램 '화요일에 만나요'에서 몸무게가 공개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그녀는 벌칙으로 몸무게를 생방송에서 공개했고, 엔딩 무대 때 거의 울었던 터라 노래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프로그램이 끝난 다음에 이택림은 시청자들로부터 큰 질책을 받았다. 다만 이건 이택림이 일부러한 게 아니라 룰렛판에 있는 벌칙 때문에 그런 거고 PD가 강제로 계속 시키는 바람에 자기도 곤혹스러웠다고 한다. 참고로 그 당시 나온 몸무게는 62kg 패널로 나오던 김종찬이 정확하게 몸무게를 맞혀서 상품을 탔고 이광조는 현재 프로필상 등록되어 있는 몸무게를 예언한 셈이다.

그러자 이택림이 옷이 20kg 나가고 신발이 5kg 나간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면서 그 무게를 감안해서 재겠다는 등 정수라를 달랬고 그녀의 무대 이후 이광조 차례가 되기 전 옷과 신발 무게를 빼면 실제 몸무게는 40kg 나간다는 말을 했다.

요즘에 이런 방송이 나가면 캡쳐본이 SNS와 기사에 일파만파 퍼지는 건 기본이고 시청자의 강한 항의와 함께 MC 하차나 프로그램이 없어질 수도 있었으나 당시에는 전화로만 시청자 의견을 표명했던 시절이라 여론은 금방 사그라들었다. 이 방송은 1990년 10월까지 방송되었고 이택림은 여러분의 인기가요로 이전하여 1992년 초까지 진행했다.

따지고 보면 당시 그녀의 체중은 많이 나가는 것이 아니다. 화면상으로 많이 통통하게 나오지만, 얼굴이 좀 크고 둥근 탓, 골격이 큰 때문이고 일단 키가 크기 때문. (프로필상의 키가 165cm인데, 직접 본 이에 따르면 실제로는 2-3cm 더 큰 것 같다. 당시엔 여성은 키가 크면 좀 줄여서 적는 경향이 있었다. 165cm만 해도 2010년대 한국 여성 평균 키를 가뿐히 넘고 당시는 매우 큰 키.) 당시 다른 가수들과 같이 서 있는 장면을 비교해 보면 상당한 장신임이 드러난다. 하여간 이 일에 충격을 받고 다이어트를 감행해 날씬한 체형이 되었고, 2010년대에는 나이가 나이니만큼 다소 체중이 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래도 날씬한 체형을 유지하고 있다. 



여담

1985년 10월 12일 싱가포르에서 열린 '제 1회 아시아 방송연맹(ABU) 가요제에'서 구창모와 정수라가 듀엣으로 부른 '아름다운 세상'이 대상을 받았다.

위의 몸무게 강제 공개 사건 이후로 절치부심 했는지 50대 답지 않은 몸매를 보여주고 있다.

청바지를 즐겨 입는다. 무대에서도 스키니진, 찢어진 청바지 등 가리지 않고 입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고 오히려 80년대 당시보다 패션센스가 더 파격적이기에, 예전부터 그녀의 활약을 지켜본 사람들은 처음에는 정수라가 맞냐고 물어보기도 한다.

상술한 바와 같이 세대를 가리지 않고 무대를 압도하는 가수로, 싸이처럼 일단 달리고 보는 스타일이다. 그리고 무대에서 간혹 막춤을 보여주곤 한다.

슈퍼스타K6에서 버스터리드가 1988년 히트곡인 '환희'를 메탈로 편곡한 적이 있으며, 후배 가수 싸이가 2005년도에 리메이크했다.

가요톱텐에서 역대 3번째로 1위를 많이 수상했다.(총 21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