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무슬림 무함마드 깐수 '정수일'의 정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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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무슬림 무함마드 깐수 '정수일'의 정체


2021. 6. 12.

대한민국의 역사학자, 인류학자, 아랍어·아랍문화학자. 주 연구분야는 실크로드를 포함한 동서 문명 교류사로, 한국에 얼마 없는 중동 지역 역사, 문화학에 대한 권위자이다.

과거 신분을 숨기고 아랍인 '무함마드 깐수(Muhammad Kansu)'라는 이름으로 위장하여 입국, 이슬람 문화에 대한 박식함과 유창한 아랍어로 단국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사학과 교수직을 맡아 가르쳤으나 1996년 국가안전기획부 조사 도중 북한의 간첩이라는 사실이 드러나 체포되었다. 이후 당국에 전향서를 내고 간첩죄로 복역하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학술적 성과와 적극적으로 간첩행위에 협조하지 않았다는 점 등이 인정되어 2000년 특별사면되었으며, 2004년 복권되었다. 복권된 이후에는 다른 북한이탈주민처럼 본명인 정수일로 활동하고 있으며, 한국문명교류연구소의 소장을 맡으면서 왕성한 연구를 하고 있다.



1946년생 역사학자로 이름은 무함마드 깐수. 필리핀인 아버지와 레바논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로 모국어는 아랍어이다. 원래 아버지를 따라 필리핀 국적이었으나 7살 때 레바논으로 건너가 현지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레바논 국적으로 귀화했다.

1984년 말레이시아 말레이대에서 있던 중 「동아시아에로의 이슬람 문화 전파사」를 주제로 학위 논문을 준비하다가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 한국에 처음 입국했다. 1984년 4월 연세대학교 어학당에서 공부하다가 그해 9월 단국대학교 사학과 박사 과정에 입학해 1989년 9월 <신라와 아랍·이슬람 제국 관계사 연구>란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사실 한국과 인종적, 언어적, 문화적으로 인연이 있다고는 볼 수 없는 사람이지만, 한국에서 박사 과정을 할 수 있도록 단국대 측에서 배려를 많이 해 주었고 좋은 사람들도 만나면서 자연스럽게 눌러앉게 되었다.

동서 문명 교류사와 실크로드학의 권위자로 1990년 단국대 사학과 초빙교수, 1994년에는 조교수로 임명되었다. 교수로 재직하면서 동서 문화 교류사에 대한 강의를 계속했다. 80년대부터 KBS 3TV(지금의 EBS) 등의 교양 역사 프로에 고정 자문 위원으로 활약했고 이후 신문에 사설도 게재하고 저술 활동을 활발히 하면서 국내 문명 교류사 분야에서는 독보적인 존재가 되었다. 1990년부터는 한국외대 동시통역대학원에도 출강하였다. 그러면서도 매우 연구를 열심히 해서, 항상 밤늦게까지 연구실에 남아 공부하였다. 논문. RISS에 깐수로 검색해 보면 꽤 많이 나온다.

워낙 유명한 연구자이다 보니 그의 글이 1991년 중학교 1학년 교과서에도 실렸다. '스승은 제자가 자신의 업적을 능가했을 때 보람을 느낀다'는 내용의 수필이다.

아랍어, 필리핀어, 한국어, 영어 외에도 불어, 독일어, 일본어, 한문까지 구사할 정도로 어학에 능통한 사람이었다. 한국어를 처음 배운 게 1984년 연세대 어학당에서였는데 불과 5년 만에 박사 학위를 취득할 정도로 한국어를 잘 했다. 말투가 어눌해서 외국인 티를 숨길 수는 없지만 그건 당연한 거고...

매주 금요일마다 기도를 드리는 등 독실한 이슬람교 신자였고 레바논과 한국이 축구 경기를 할 때는 늘 레바논을 응원했으며, 미국과 이라크가 전쟁을 할 때에는 미국에 비판적인 글을 신문에 기고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학생들에 따르면 깐수 교수는 "된장국까지 좋아할 정도로 한국을 사랑하시는 사람"이라고 다들 생각했다고 한다. 아내와는 1986 서울 아시안 게임 아랍어 통역을 하다가 만난 인연으로 1988년 11월 결혼했는데, 당시 깐수는 42세, 아내는 26세였으며 아내는 서울시내 종합병원 간호사로 재직하던 사람이었다. 둘 사이에 자녀는 없다.

1992년 인터뷰에서 귀화 문제를 진지하게 고려하고 있다는 그는 『내가 귀화하면 「20세기 처용」이 되는 것 아니겠느냐』며 크게 웃었다.



성품도 선량한 사람으로, 사학과 석사 과정 대학원생은 "성격이 밝고 쾌활해 학생들에게 인기 있는 외국인 선생님이었다"고 평하였다. 이웃들은 "자상한 '간디' 교수"라고 평하였다.

학부에서도 성적이 후하기로 유명한 교수였기에 수강신청이 몰리는 교수였으며 별명은 '에이뿔 폭격기'였다. 일례로 당시에 단국대학교는 상대평가가 아닌 절대평가로 학점을 주는 시기였는데 수업 시간에 면학 분위기를 심하게 해치는 학생에게 "자네는 이번 학기 B+야!!!"라고 말한 것은 당시 단국대생들에게 매우 유명한 일화다.



그의 정체는 중국 조선족 2세 출신의 북한 간첩 정수일이었다.

기존에 알려진 이름, 나이, 국적, 종교, 출신지, 경력, 모국어, 구사 가능한 외국어, 학력, 기혼 여부 및 자녀 유무까지 모두 거짓이었다.

1934년 11월 12일 (86세) 만주국 지린성 옌지(길림성 연길)에서 중국 조선족 2세로 태어나고 자랐다. 중국 조선족 최초의 고급중학인 연길고급중학(현 룡정고급중학)에 입학해서 역시 조선족 학교 졸업생으로는 최초로 베이징대학 아랍어과에 입학했다. 수석으로 졸업한 이후에는 중국 정부 국비장학생 1호가 되어 1955년~1958년 이집트 카이로 대학교 아랍어문학과에서 공부했다. 1958년에서 1963년 사이에는 주 모로코 중공 대사관에서 2등 서기관으로 활동했다.

모로코 국왕과 중국 고위직 사이의 통역을 맡았던 사진도 남아 있다. 엘리트 코스였고, 그 스스로도 그대로 살아간다면 부와 명예를 동시에 지닐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1963년 6월에 북한 국적으로 귀화하게 되었다. 당초 중국 내 소수민족 차별에 실망하여 귀화했다고 알려졌으나, 본인은 2018년 신간 문명의 요람 아프리카 가출판 기념 기자간담회에서 민족주의를 자각한 뒤에 조국 통일에 기여하고자 내린 결심이었다고 밝혔다. 본인은 중국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나, 부모의 영향으로 중국인이 아닌 조선인(한국인)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자신의 직속 상관이었던 제1부총리 겸 외무부장 천이(1901-1972)와 대판 싸우고도 북한으로의 귀화를 허락받지 못했기 때문에 끝내 저우언라이 총리에게 편지로 탄원해서 북한 국적으로 귀화한다. 문화대혁명을 피해 북한으로 도망갔던 조선족들은 대부분 종파 분자로 몰려서 숙청당했는데, 정수일은 저우 총리가 공식 발급한 허가증을 받고 귀화한 덕분에 이후 살벌한 숙청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때 저우 총리도 정수일과 같은 엘리트 인재가 떠나는 게 아까워서 직접 여성을 소개해 줄 테니 결혼해서 중국에 남아달라고 권유했지만, 이를 거부하고 북한으로 가게 된다. 소수민족 출신 일개 5급 공무원 외교관이 자신의 혈통상 조국으로 가겠다고 자진 사표를 냈는데 부총리 겸 외교부장관이 거절해서 격하게 싸우고, 국무총리가 직접 중매까지 서주겠으니 가지 말라고 말렸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사직해서 귀화한 셈이라는 점에서 이 사람이 얼마나 비범한 삶을 살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북한으로 귀화한 후 1974년까지 평양 국제관계대학 교수와 평양외국어대 동방학부 아랍어학과 교수로 재직하였으며, 마지막에는 아랍어과 학과장까지 맡았다. 정수일은 중국의 소수민족 정책에 회의를 품어 넘어온 북한에서 자신을 일개 어학 교수로 대접하며 매주 1, 2일씩 막노동을 강요하고 매주 25시간, 강의 외의 아랍어 방송으로 자신을 혹사시키는 것에 힘들어 했으며, 심지어 평형감각을 상실하는 귀의 미로염(전정신경염)을 앓았다고 한다. 1963년 9월 8일자 로동신문에는 아랍 대표단 방북 시 김일성의 통역을 맡는 사진이 보도되기도 했다.

평양외국어대 아랍어 교수로 재직하던 중 정수일 교수의 해박한 언어 구사 능력과 이국적인 느낌의 외모에 관심을 가진 조선로동당에 의해서, 1974년 9월부터 4년 5개월에 걸쳐 간첩 교육을 받으면서 남파 간첩으로 변신하게 된다.

1979년 1월 공작금 1만 달러를 가지고 "레바논 국적을 취득해 남한에 잠입해 주요 정세 정보를 수집하라"라는 지령을 받았고 '이철수'라는 이름으로 평양을 출발하여 당시 전쟁으로 국내 사정이 혼란스러운 레바논 베이루트로 향했다. 친북 단체인 '레바논 조선친선협회'와 북한 대사관의 도움으로, 1979년 11월 '무함마드 깐수'란 이름으로 레바논 국적을 취득했다.

하지만 레바논 국적으로는 남한에서의 활동이 힘들다는 판단하에 튀니지에 입국해 튀니지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하고 사회 경제 연구소 연구원으로 일하면서 기회를 모색하였다. 튀니지는 호적 관계법이 잘 정비되어 있어 국적을 취득하기 힘들다고 판단하고, 말레이 대학 이슬람 아카데미 강사(1982.7)를 거치는 등 호주, 파푸아뉴기니,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등의 국적 취득 기회를 모색하였으나 모두 실패하였다. 1983년 4월 필리핀에 입국, 1984년 2월에 필리핀 아버지와 레바논 어머니 사이의 아들인 '무하마드 깐수'로 국적을 세탁해 한국으로 들어오는 데 성공했다.

1984년 연세대 어학당에 들어와서 한국어를 배운 것도 당연히 전혀 배울 필요 없는데 위장을 위해서 배우는 척한 것이다.

사실 더 일찍 잡힐 수도 있었다. 1984년 5월에 방을 구할 때 한국의 화폐 단위를 원화가 아닌 구 화폐 "환"으로 착각하여 용산구 한남동의 복덕방 주인에게 의심을 샀고, 은연중에도 북한 사투리가 강하고 연락처가 없다는 점에서 위화감을 느낀 복덕방 주인이 신고를 했으나 국내 이슬람 지도자들이 신원 보증을 해줘서 풀려났다. 이 사실은 수사 기록에도 남지 않은 채 오랫동안 잊혀졌고, '깐수'가 거리를 활보하는 것을 본 복덕방 주인은 그에게 미안한 마음까지 들었다고 한다.

1984년 6월부터 단파라디오를 이용해 1996년 7월까지 161차례에 걸쳐 북한의 지령을 수신했다. 한국에 와 있는 동안 상부에서는 구체적인 첩보 활동을 요구했고, 그는 월간 잡지에 나온 '신상옥 · 최은희의 최근 소재지', '클린턴의 방한', '남조선 학생 운동권의 최근 동향', '최신형 전차 생산 및 첨단 첩보기 도입' 같은 기사들을 편집, 분석하여 중국 베이징 시와 선양으로 보냈다. 1987년 2월부터 1995년까지 4차례 밀입북하여 김일성 부자 충성 맹세문과 "조국 통일상"을 수상하고, 단파수신기, 암호표, 독약앰풀, 공작금 19,000달러 등을 받기도 했다. 흔히 생각하는 첩보 방식과 비교하면 원시적인 행위였지만, 어쨌든 이 방법은 굉장히 안전했다. 1996년 2월까지는 암호 편지를 이용해 약 75회 정보를 보냈고 안기부에서는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겉으로는 영어로 쓴 편지지이지만, 뒷면에 특수 잉크로 정보 보고문이 작성되어 있었다. 이 잉크는 작성 뒤 20분 정도 지나면 육안으로 절대 확인할 수 없으며, 특수 약품 처리를 해야 글씨가 나타난다.

그러다 1996년 3월부터 팩스로 전송 수단을 바꾸는 바람에 잡혔다. 1996년 3월 안기부는 도청을 통해 '서울 시내 특급 호텔 비즈니스센터 팩스'를 통해 남한의 군사 정치 정보가 외국으로 전송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팩스의 수신지는 북경 주재 북한 대사관이었다.

그래서 안기부는 시내 각 호텔 근처에 CCTV를 설치해 감시했고, 그 결과 아랍계로 보이는 사람이 비즈니스센터를 이용해 특정 시간대에 북경으로 팩스를 전송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안기부는 몽타주를 만들어 시내 각 호텔에 돌리면서 신고를 부탁했고, 결국 1996년 7월 호텔에서 팩스를 발송하려고 시도하던 중 호텔 직원 김 모 양(26)이 팩스 고장을 가장해 전송을 지연시키면서 간첩신고를 해서 그를 체포하게 된 것이다.

훗날 재판 과정에서 공개된 바에 따르면 첩보 내용만 보면 북쪽에서 도움이 될 만한 가치는 거의 없었다고 한다. 판결문에도 그런 점이 반영되어 구형인 사형에서 12년형으로 선고되었다. 사실 그가 보낸 잡지나 신문 기사 따위는 정보 분석자의 손을 거쳐 유용한 정보로 사용할 수 있으나, 그런 것들은 일본 혹은 제3국을 통해서 실시간으로 얻을 수 있기 때문에 획득은 어렵지 않아서 북한한테는 있으나 마나 한 정보원이었다. 인간 정보가 효과를 발휘하려면 아무래도 대학 교수보다는 군 간부나 고위 공무원 같은 사람들이 훨씬 유용하다.

그의 위장이 철저하다 보니 아내조차도 정수일이 검거되기 전까지는 그가 간첩인 줄 전혀 몰랐는데, 잠꼬대도 아랍어로 했다고 한다. 그리고 철저히 정치적 발언을 입에 담지 않았으며, 가끔 가다 무슬림들의 생활 방식을 따르는 코스프레까지 하는 등 정말 철저했다. 또한, 교수로 활동할 당시 학생들의 말에 의하면 한국과 아랍권 국가가 축구 경기를 할 때면 늘 아랍 국가를 응원했다고. 교수 임용을 할 때도 신원 조회 절차가 있었지만 워낙 치밀하게 위장해 놔서 걸리지 않았다. 이슬람 사원에서 수많은 아랍인을 만났을 텐데도 들키지 않았다.

심지어 남한에서 한 결혼이 초혼도 아니었고 북한에 아내와 세 딸이 있었다. "간첩 활동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부인이 알고 있었나?"라는 질문에 북한의 조강지처 이야기부터 먼저 꺼냈다. 당시 정수일이 62세로, 아내 박광숙(61, 당시 평양 모란봉극장 안무지도자), 장녀 정미란(33, 김일성종합대학 프랑스과 졸업 후 당시 평양시당 선전국 홍보원), 차녀 정달미(31, 김일성종합대학 문학과 졸업 후 중앙통신사 기자), 삼녀 정소나(30, 평양무역대 졸업 후 당시 무역회사 근무) 가족이 북한에 있었다.

처음에는 무하마드 깐수라고 극구 주장하다가 안기부 수사관이 서류상 고향인 필리핀 민다나오 섬 사투리를 물어보자 대답을 하지 못했다. 이후 그가 더 이상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고 판단한 듯 자백하기 시작했다.

서류상으로는 필리핀 국적이었다가 레바논 국적으로 귀화했으므로 정수일은 국제법상 국외 추방을 요구할 수 있었다. 처음에 그가 수감된 곳도 구치소가 아니라 출입국 관리법과 관세법 위반자들이 수용되어 있는 곳이었다. 그러나 그는 출국할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포기하고 자기의 국적은 분명히 '북조선'임을 밝혔다. 체포되었을 당시에는 약간 어수룩한 한국어를 쓰던 외국인으로 행세 중이었는데, 체포된 이후부터는 취조부터 재판까지 아주 멀쩡한 한국어를 구사해서 간첩 혐의를 수사하던 담당자들을 놀라게 했다. 결국 재판에서는 사형을 구형받았다.

체포 당시 그는 방대한 자료와 주석을 붙인 《동방교역사(가제)》의 원고 마지막 부분을 정리하던 상태였는데, 검사는 그를 취조하던 도중에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사형이 구형(求刑)된 후 선고 전날, 검사가 압수당한 원고가 저장된 컴퓨터를 가져다 주어, 검사실에서 몇 시간 동안 정리하도록 배려해 주었다고 한다.

그가 전향하지 않으려는 이유는 북한의 아내가 받을 고통을 생각해서였다. 남한에서 만난 후처에게도 '나를 잊어달라'고 편지를 보냈다. 하지만 뜻밖에도 후처는 매달 2번씩 면회를 오면서 편지를 계속 교환했다. 둘의 부부 관계는 투옥 이후 새롭게 시작된 것과 다름없었으며 그녀의 지극한 옥바라지에 흔들렸다고 한다. 결국 1996년 11월 전향서를 제출했다.

초기에는 사형이 구형되었다. 그러나 변호인단은 물론 재판부도 그의 사연과 그 동안의 연구 성과, 전향 의사, 그리고 조사 결과 '언론 보도 사실만 북측에 전달했기 때문에 국가 기밀 탐지 혐의가 거의 없다'는 점을 감안하여 최종적으로는 징역 12년형이 선고되었다. 이후 2000년 광복절 특사로 4년 만에 출소한 후 2003년에 특별 사면 및 복권을 거쳐 학계로 돌아왔다.

체포된 뒤 단국대에서도 극심한 혼란이 있었다. 정수일이 구속되는 바람에 학부와 대학원에 개설된 강좌가 폐강되는 등. 제자 대학원생들이 법정에 방청하러 왔는데, 정수일은 그들을 보고 담당 교수로서의 죄책감에 눈물을 흘렸다고 회고한다. 단국대 대학원에서는 그의 박사학위를 취소해 버렸는데, 무함마드 깐수라는 위장 신분으로서 받은 학위였고 시대가 그런 시대였으니 불가피한 처사였다 해도 학문을 평생의 업으로 하여 살아온 뼛속까지 학자인 정수일에겐 가슴 아픈 일이었음을 본인은 후일 회고했다.



석방 후인 2008년에는 한국문명교류연구소를 설립해 연구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간첩이었던 과거 때문에 이전만큼 방송에 많이 나오지는 못하고 있지만 그래도 다큐멘터리에는 꽤 나오는 편이다.

뉴스위크에서는 그를 가리켜 "분단 시대의 불우한 천재 학자," "문명교류학의 세계적 권위자"라고 평가하였으며 황석영도 극찬했다.

수감 중 편지도 명문에 옥중에서 한 학문적 연구까지 담겨있다. 북한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는 조선일보마저도 그의 학문적 업적에 대해서는 찬사를 보냈을 정도였다. 게다가 수감 중 남한의 아내도 그를 버리지 않았고, 계속 옥바라지를 했다고 한다.

지금은 '정수일' 본래 이름으로 돌아와 아랍 연구와 실크로드나 유라시아 관련 연구 책을 쓰며 활동 중이다. 아직도 일부 사람은 그가 간첩이라고 하며 부정적으로 보고 있지만, 위에 언급한 대로 그가 진짜 간첩으로 활동하던 시기에 북한으로 전달한 문건도 아랍의 역사 및 연구 관련 정보를 많이 보냈기에 북한에서도 "이딴 걸 뭐 하러 보내느냐?"라고 짜증을 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북한의 아랍 분야 인문학 연구가 남한보다 뒤쳐져 북한 학계가 연구에 참고하길 바라면서 보냈다고 했고, 실제로 북한에서도 아랍 교류에 나름 관심을 가져 시리아, 리비아, 이집트 등과 교류하고 아랍어 학생들을 정책적으로 육성하긴 하지만 북한이 정수일에게 원한 정보는 그런 종류의 정보가 아니었다.

그는 군사나 외교 전문가가 아닌 역사학자였으니 군사 정보 취득을 목적으로 한 간첩으로 부적합했다. 사람을 잘못 골랐던 것이다. 북한이 그를 남파한 뒤 그로부터 얻은 정보와 남파된 그가 전향을 한 지금까지 대한민국의 학계에서 공유 · 발전시킨 정보를 비교해 본다면 북한이 압도적으로 손해를 본 것이나 다름없다. 그냥 북한이 아랍 분야의 천재 학자 한 명을 공짜로 남한에 퍼준 셈이다.

더 나아가서 정수일 교수가 한국과 중동 국가(특히 이란)의 관계 개선에 많은 공을 세웠고, 지금도 하고 있다. 한국이 북한 정보를 얻는 중요 라인 중 하나가 이란이다. 특히 북한 무기를 직접 사 주는 몇 안 되는 나라이기도 하다. 정수일이 직접 북한에 준 남한 정보보다 간접적으로 남한에 준 북한 정보가 훨씬 더 양도 많고 가치는 비교가 안 된다.

정수일은 아랍어에 능통한 데다 그쪽 지리 및 여러 지식도 매우 많아서 현재 대한민국에서는 매우 보기 드문 아랍 및 이슬람 관련 전문가로서도 높이 평가를 받고 있다. 실제로 이슬람 분야와 관련된 여러 가지 분야에서도 괄목할 만한 성과를 올리고 있는 중이다. 석방 이후의 저술을 보면 심하게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한 측면이 종종 드러나기는 하나, 역사학자로는 비교적 중립적인 시각에서 역사를 서술하고 있다. 그래서 정수일은 세계적으로도 권위 있는 이슬람권 역사학자로 극진하게 대접을 받고 있다.

그래서, 이 사건 때문에 연세대학교와 단국대학교가 크게 곤욕을 치렀었다. 체포 당시 단국대학교 초빙교수였기 때문. 연세대는 어학당에 다녔던 정도지만 실질적인 학문 활동을 했던 단국대학교가 당황스럽기는 더했을 것이다. 그래서 교내 역사학 교수들 중에서 정수일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교수가 종종 있다.

정수일 교수는 동아시아사, 특히 이슬람의 역사를 다루는 학문 분야에서는 반드시 전문가로 꼭 언급된다. 실제로, 단국대 사학과 교수들은 당시 서울 한남동 캠퍼스와 천안 캠퍼스를 오가면서 강의하는 일이 많다고 한다. 특히, 정수일 교수를 아는 사람들은 대부분 꽤 나이가 많으신 사람들이다. 만약에 1984년 이후부터 단국대학교에서 교수로 근무하거나 석/박사 과정을 밟은 사람이 아직도 학교에 있다면 100%다.

2011년에는 중국으로 가서 조카 쪽 가족들과 50년 만에 재회하기도 했으며 모교 방문 등의 활동을 했다. 모교 측에서는 그 학교에서 처음으로 북경대에 진학한 두 명의 학생 중 한 명이라는 사실을 알고 바로 정수일과 다른 학생의 사진을 확대해서 학교의 역사 자료관에 걸어뒀다고 한다. 중국에 있는 가족과 친척들과 재회해서도 정수일의 조카들과 조카 손자들이 중국어만 하고 한국어를 잘하지 못하자 굉장히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2021년 현재 고령의 나이에도 한국문명교류연구소장으로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