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이 과거에는 잘살았고 심지어 선진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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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이 과거에는 잘살았고 심지어 선진국이었다?


2023. 5. 30.

 

몇몇 사람들은 마르코스 정권 시절부터 필리핀의 경제가 나빠지기 시작했다고 주장했지만, 실제로는 꾸준히 성장했다. 마르코스 집권 이후 1982년경까지 필리핀 경제는 확실한 성장세였다. 경제 성장 속도만 놓고 보면 동시기 수하르토 치하의 인도네시아와 비슷했다. 이 덕에 처음에는 마르코스를 지지하는 국민들도 의외로 많았다. 다만, 베니그노 아키노 암살 사건 등으로 입지가 명백하게 불안해진 1983년 ~ 1986년에는 경제 성장이 하락세였고, 이는 마르코스가 더 이상은 정권을 유지할 수 없게 된 큰 원인이 되었다.

필리핀이 마르코스 정권 이전에는 아시아에서 괜찮은 환율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덕에 19세기부터 중국본토에서 하층민 화교들이 이민했던 것도 사실이다. 이 이야기는 경제가 아닌, 부정부패 문제와 관련해서 막사이사이와 마르코스가 극적인 대조를 보였다는 것이 와전된 것으로 보인다. 단순히 1960년 ~ 1965년 1인당 GDP로만 비교해 봐도 필리핀은 100달러 중반에서 200달러 중반 정도이지만, 말레이시아는 이미 그 시기에 200달러 중반에서 300달러 초반이었다.심지어 싱가포르는 400달러 초반에서 500달러 초반이었다. 이미 1960년대 당시에도 동남아시아에서 필리핀은 그닥 잘사는 편은 아니였다. 애초에 말레이시아나 싱가포르는 원래 이 지역에서도 그나마 잘사는 곳이었다.

필리핀은 독립 뒤 제조업 육성을 위한 기계와 원자재 수입에 대한 우대환율정책과 기업에 대한 세제 우대 등을 시행했다. 당시 필리핀은 미국과의 관계 덕분에 한국전쟁으로 인한 전쟁 특수를 누렸고, 1955년 유엔 아시아극동위원회가 발간한 ‘아시아와 극동의 경제 보고서'에서 당시 필리핀의 1946~1954년 연평균 경제성장률은 14.5%로 당시 아시아 지역에서 1위였다.

그럼에도 해방 직후 ~ 한국전쟁 이전까지의 한국의 국민소득과 큰 차이는 없었다. 해방 후 ~ 한국전쟁 이전의 대한민국은 대만과 국민소득이 비슷하였다. 동남아시아에서도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등은 필리핀보다 1인당 국민 소득이 높았다. 필리핀이 한국에 비해 1인당 국민 소득으로 우위를 점한 때는 한국전쟁 이후 ~ 60년대 초중반의 약 10년 정도의 기간이며, 60년대 필리핀의 1인당 국민소득은 1960년 $254, 1961년 $267 정도였다.

그 다음해 $156로 떨어졌고, 반등에 실패하여 1960년대 전반적으로 평균 $200달러 내외의 소득을 보였으며, 이후 성장률이 정체하면서 1969년을 기점으로 한국에게 1인당 국민소득을 추월당하였다. 한국의 경우 1960년 $159, 1961년 $94였다. 1962년에 $106로 오른 이후 꾸준히 올라 60년대 평균 역시 $100달러 중후반대의 소득을 보였다. 60년대 한국 1인당 gdp는 캄보디아, 태국 등과 비슷하였다. 그러다가 1969년을 기점으로 필리핀의 1인당 국민소득을 추월하였고, 이후 격차가 엄청나게 벌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흔히 필리핀이 60년대 이전까지 대한민국보다 훨씬 잘 살았음은 물론 선진국에 아시아 국가들의 롤모델이었다는 이야기가 많이 퍼져 있는데, 이 이야기들은 틀린 말이다. 왜냐면 정작 1960년대의 1인당 GDP를 보면 한국이나 필리핀이나 별로 차이도 나지도 않고, 1969년부터 한국이 필리핀에게 확실한 우위를 점하기 시작한다. 필리핀은 이미 1960년대에도 동남아시아에조차 잘 사는 나라가 아니였다. 그리고 국토가 초토화된 전쟁에서 벗어난지 얼마 안 된 한국과 한국전쟁으로 인한 특수를 누릴 수 있었던 필리핀의 경제 상황을 비교하는 건 의미가 없다. (필리핀은 미국과의 관계 덕분에 특수를 누릴 수 있었다.)

애시당초 필리핀은 한참 전부터 식민지 경제체제가 유지되었고, 미국이 독립시킨 뒤에도 (미국 본토가 대공황이라) 막대한 투자나 지원도 받지 못했고, 태평양전쟁 발발과 동시에 일본에게 공격당했다. 6.25전쟁에 휩싸이기 전까지의 한국과 비교해서 딱히 나을게 없다.

또한 60 ~ 70년대 필리핀과 한국의 거리 사진을 비교하는 식의 게시물을 종종 볼 수 있는데, 정작 필리핀은 대도시의 도심 지역 사진이고, 한국은 외곽의 시골 지역 사진을 비교해 놓았다. 이런 식의 비교 자료를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식의 비교라면 그 당시 한국이 일본이나 말레이시아보다 잘 살았다는 논리도 댈 수 있다. 실제 한국 60년대 서울 도심 지역 사진은 이렇다.

여러모로 한국의 전후 급격한 경제성장이 매우 드라마틱했기에 이는 한국인들의 자부심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오히려 그런 자부심이 과도하게 본인들의 과거를 과소평가하게 되는 경향으로 변질됐고, 저런 식의 선동적인 글도 여과없이 받아들이게 됐다.

한때 한국이 필리핀을 롤모델로 삼았다는 근거 없는 루머가 퍼져있다. 당시 외무부 장관이었던 이동원의 회고록을 살펴보면 애초에 박정희는 필리핀을 후진국이라고 무시하였다. 또한 서울의 장충체육관을 지을 기술이 부족했던 한국 대신 필리핀이 지어줬다는 얘기가 이상하게 많이 퍼져 있으나, 거짓이다. 장충체육관은 필리핀과는 아무 연관도 없다. 심지어 이명박 전 대한민국 대통령 또한 이게 사실인 줄 알고 필리핀을 방문했을 때 얘기한 바 있다. 나라의 대표인 대통령이 외교관계에서 잘못된 정보를 말한건 문제가 있으며, 외교에는 사실 확인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 외에 미국 대사관, 경제기획원(현 문화관광부) 등의 청사 건설에 필리핀 엔지니어가 참여했다는 설도 있으나, 전부 확인되지 않은 추측의 영역이다. 그리고 아주 만약에라도 필리핀 엔지니어가 참여했던 게 사실이라고 한들, 몇몇 기술자가 '참여'한 것이 어떻게 '지어줬다'는 셈이 되고, 돈 주고 고용한 게 어째서 '지어줬다'는 게 되는 건지 의문이다. 애초에 이런 식으로 몇몇 사람이 건설에 참여한 걸로 따진다면 밑도 끝도 없다. 확실하게 검증이 되는 '사실'들은 필리핀은 기업 단위로 한국에 건물을 지은 적도 없다는 것과 지을 수 있는 역량과 기술도 없었다는 거다. 당시 필리핀에서는 건축물을 지을 때 미국 기업에 의뢰하는 게 당연했던 시절이었다. 이처럼 잘못된 사실이 우리나라 사회에 뿌리내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