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차로 아우슈비츠에 도착한 유대인들. 한가운데 초점이 맞춰진 집단은 아동과 노인 즉 바로 가스실로 갈 집단이다. 사진을 자세히 보면 미소를 짓고 있는 듯한 유대인들도 보이는데, 얼마 안 가 자신들에게 참혹한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사실을 몰랐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씁쓸한 장면이다.
홀로코스트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아돌프 히틀러의 독일 나치 정권이 일삼은 학살극을 뜻한다.
이러한 홀로코스트의 주된 희생자는 유대인이었으며, 유럽 내 유태인 9백만 명 중 3분의 2인 6백만 명이 죽었다. 그 외에 집시, 장애인, 동성애자 또는 나치스를 정치적으로 반대하던 자들도 포함되기도 한다. 총 희생자의 수는 흔히 알려진 유대인 600만을 포함한 1,100만 정도로 잡는다. 좀 더 넓게 정의할 경우 동부 전선에서 군사작전 중에 죽은 민간인을 제외한 나치 점령지에서 정책적으로 학살당한 소련인까지 포함해 1,700만까지 잡는 경우도 있다.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에서 궁지에 몰린 독일 제국은 항복을 선언했다. 1919년 1차 세계대전은 종료됐으며, 민족자결주의의 원칙에 따라 패전국들은 모든 식민지를 잃었다. 그러나 민족자결주의는 승전국들의 식민지에는 해당하지 않았고, 식민지를 빼앗긴 독일의 경제는 나락으로 추락하게 된다. 때마침 프랑스에서는 거액의 보상금을 요구했고, 전후 독일에 세워진 바이마르 정부는 위기를 극복하지 못한 채 혼란과 혼란을 거듭했다.
이미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기 전부터 독일에는 반유대주의 사상이 싹트고 있었다. 그렇지만 드레퓌스 사건에서도 알 수 있었듯이, 그 정도의 반유대주의 감정은 유럽 대륙에서 흔한 것이었다. 아돌프 히틀러가 반유대주의 감정을 처음 접했을 때는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직전이며, 아돌프 히틀러 본인 역시 반유대주의 사상을 접하고도 상당 기간 유대인에 대한 적대감을 표현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아돌프 히틀러는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이후, 나치당에 가입하면서 반유대주의 감정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히틀러의 게르만족 우월주의에 따라, 제1차 세계 대전 패배의 원인을 독일인이 아닌 다른 구성원들에게 찾아야만 했는데, 그 목표가 바로 유대인이었다. 히틀러의 이론에 따르면 전쟁에서 진 이유는 유대인의 배신과 무능 때문이었다. 유대 자본은 유럽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했기 때문에, 유대 자본 흡수를 위해서라도 히틀러에게 반유대감정은 필요했던 것이라고 추측된다.
1929년, 전 세계를 강타한 경제 대공황은 반유대주의를 강화할 수 있는 좋은 구실이었다. 대중들은 분노했으며, 전부터 쌓여왔던 반유대주의는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히틀러는 연설 능력이 뛰어났는데, 그의 연설도 반유대주의가 설파되는 데에 큰 역할을 했다. 아돌프 히틀러는 나치당의 지지 상승을 위해 유대인에 대한 증오를 이용했다. 네로 작전에서도 알 수 있듯이, 히틀러는 광기에 충실한 정치가였다. 비인간적인 광기와 문명의 거대한 힘이 결합하면서, 유대인 학살의 토대는 마련되고 있었다.
홀로코스트는 여타 학살과 구분되는 몇 가지 특이점이 있다. 인류 역사상 학살은 어디를 가나 항상 존재했다. 그러나 이전까지의 학살과 매우 확연하게 구분되는 점은, 전쟁터에서 우발적, 충동적으로 벌어지는 포로 학살이 아닌, 자국 내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매우 계획적이고 산업적인 형태의 체계화된 학살이라는 것. 그리고 학살이 수단이라기 보다는 목적으로 보인다는 것.
사실 홀로코스트라는 건 아돌프 히틀러 혼자만의 작품은 아니다. 제3 제국의 인종정책의 의미는 사실 땅을 점령해서 독일인에게 배분하겠다는 소리다. 그렇다면 결국 "그 영토에 사는 사람들은 독일인이어야 했다"는 논리적 문제가 생기는 거다. 즉, 슬라브인이나 폴란드인들을 그 땅에서 추방하거나 잡아 죽이고 그 땅을 독일인에게 준다는 개념을 생각해 낸 것이 특징 아닌 특징이다.
게다가 어찌 보면 이 학살의 과정은 그냥 자기가 국민으로 삼은 데는 후하고 아닌 놈들에겐 더없이 가혹했을 배타주의적 상징으로 시작된 거라고 보면 되지만, 유대인 학살의 경우를 예로 들어 보면 그 유대인들이 소유한 경제권과 상권, 자금을 독일인들에게 돌려준다는 개념으로 시작된 것으로 실제로 살던 집 빼앗아서 독일인에게 줘 버리는 등의 행동을 서슴없이 저질렀다.
헌데 문제가 이런 행동을 하게 되면 유대인들이 미국으로 날라 버리거나 재산 챙겨서 3국으로 도주하는 등의 사태가 생기면 골치 아파지므로 아예 그냥 강도질을 해 버린 거라고 보면 된다.
즉, 히틀러의 문제는 아리아계 독일인만 국민으로 생각하고 나머지는 폐품 취급했다는 점이다. 게다가 애초에 나치당 성격상 극좌와 극우가 섞여 있어서 생긴 상승작용도 한몫한 것도 있다.
또한, 히틀러는 어찌 보면 "뭉뚱그린 개념"을 구상한 것에 지나지 않지만, 실행자 측에서 과당 경쟁이 붙어서 효과적인 학살방식과 학살정책을 내놓은 셈이다. 즉, 실제로 대부분 문제는 하인리히 힘러와 파울 요제프 괴벨스, 아돌프 아이히만 등의 작품이다.
뒤집어 말하면 이는 총통의 망상을 구체화한 셈이 되고. 게다가 이건 전쟁에 의한 과열 양상도 한몫한다. 요는 폴란드 등을 침공한 다음에 그 국가에 사는 독일계 주민을 선동해서 폴란드인들을 학대하게 하고 그로 인해서 물자징발을 통해 전쟁 수행 능력을 보충하는 식으로 조성된 일종의 체계화된 약탈체제를 구상한 것이기도 하다. 이 경우 이민족은 가혹하게 수탈해도 되지만 상대적으로 독일인을 돈 뜯지 않아도 된다는 개념이 대두되는 셈이니.... 일단 인종주의는 명분이고 그 안에서 실리를 취득하려고 한 거다. 뭐 간단히 말해 명분 있는 약탈 강도 살인 정도 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장애인, 집시, 동성애자를 학살한 부분은 대략 이런 구도다.
먼저 장애인의 경우 나치당은 이들에 대한 과도한 복지정책 등에 대해서 상당히 회의적이었다. 즉 장애인들에 대한 복지 등으로 낭비되는 재원 등을 고려하면 이것은 사회적 병폐와 나약함을 키운다고 생각했던 거다. 즉, 나치당은 장애인이 도태되면 그들의 공동체가 건강해 진다는 해괴한 발상을 가졌던 거다.
집시의 경우 유대인과 비슷하지만, 집시에 대한 관점은 좀 더 전통적인 개념에서 기인한다. 즉, 유대인들의 경우는 극좌화된 성격을 가졌던 이들의 일종의 "부르주아" 계층에 대한 증오의 성격이 있었다면, 집시에 대한 개념은 거의 극우적 발상에서 나온 것이라고 보면 된다.
동성애자들은 대략 "전통윤리적" 개념을 가지고 이뤄진 학살이라고 보면 된다. 위의 장애인과 마찬가지로 나치당의 개념은 우생학적으로 우월한 아리안 인종을 번식하는 개념으로 정리되는데, 동성애자들은 당연히도 "번식" 자체의 행위를 피하는 부도덕으로 본 거다.
게다가 이 당시는 아직 동성애를 정서 질환으로만 봤었고, 의학적 발전이 수반되지 않아서 "치료할 수 없는 장애" 정도로 봤다고 볼 수 있다.
즉, 사실은 유대인들에 대한 나치의 학살이 개념 구분되는 이유는 자본가에 대한 증오를 매개로 한 반면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심각한 아이러니는 외려 나치당원이라는 사람들 중 프롤레타리아 계층이 거의 없었다는 점이다. 즉, 극좌적 발상으로 유대 자본가에 대한 증오를 표출하는 개념을 수반하긴 했지만, 반대로 실상을 보면 이건 부르주아 계층이 같은 부르주아 계층을 좌파 논리로 깎아내렸던 개념과 연관성이 생긴다.
이러한 모호하고 모순적인 증오에 대해 '좌파 반유대주의자는 유대인 자본가에 대한 증오 때문에 유대인을 증오하고, 우파 반유대주의자는 유대인 혁명가에 대한 증오로 유대인을 증오한다'는 표현이 유명하다. 이에 대해서 명확히 이해하려면 근대의 유럽에서 도시 시민(부르주아) 계층은 자본가의 산실인 동시에 지식인 혁명가의 모태이기도 했다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근대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급속한 공업화로 농촌 공동체가 해체되고 도시로 인구와 사회적 영향력이 집중되었고, 도시 시민들이 새로운 사회의 주도 세력으로 떠오르게 된 것. 말하자면, 기존의 농업 지주를 대신하여 도시의 공업, 금융자본가들이 경제적 주도권을 쥐게 되었고, 도시화한 시민사회 내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지식인들이 영향력을 넓히게 된 것. 그런데, 유대인들의 경우 토지 소유에 제약을 받는 경우가 많고 배타적인 농촌 공동체에 편입하기는 어려웠기에 이전 시대부터 도시에 자리 잡고 사는 이들이 많았고, 따라서 도시 시민이 사회의 주도권을 가지게 되면서 유대인들의 사회적 영향력 역시 성장했다. 즉, 유대인들에 대한 혐오 자체는 중세 이전부터 이어져 내려온 것이고, 이러한 혐오가 부르주아(원문 그대로의 의미로써 부르주아, 즉 도시 거주 시민) 계급이 성장하여 사회적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유대인들이 사회를 장악하고 사악한 음모를 꾸민다'는 망상의 형태로 다듬어진 것.
즉, 유대인과 집시/장애인/동성애자들과의 개념적인 구분은 약간 다르다.
이에 대해 라울 힐베르그의 "홀로코스트 유럽 유대인의 파괴"라는 책을 증거로 "홀로코스트가 본격화 되기 이전인 30년대 말 괴벨스의 선동으로 벌어진 유대인에 대한 무차별적인 폭력 행위조차도 독일 경제에 큰 타격을 주었다고 했으며. 즉 홀로코스트는 물론이고 그보다 훨씬 더 덜 조직적이고 심지어는 온건해 보이기까지 하는 유대인에 대한 폭력조차도 독일 경제에는 이로울 것이 전혀 없었다"고 반박하는 사람들도 있고, 또한 "토지를 차지하기 위한 학살과도 그 궤를 달리하며, 경제 활동의 기반이 되는 "토지"를 가장 적은 비용으로 차지하기 위해 그 토지의 기존 거주자들을 학살하는 것이다. 이는 결국 학살이 하나의 수단임을 의미하는데, 하지만 홀로코스트는 확실히 학살 그 자체가 목적인 행위였다"고 반론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에 대해선 햇갈리지 말아야할 부분이 있다.
나치의 경제계획은 국유화를 통하여 통제경제적인 방향을 조장하여 전시대비에는 어느 정도 성과는 있었다고 해야겠지만, 결론적으로 실패한 경제정책인 것은 사실이다.
여기에 반론하는 사람이 말하는 것은 "결과"지만 당시 나치정권 자체는 그 "결과"에 대해서 몰랐다. 즉, 유대인들이 경제권을 가지고 있다(뭐 로스차일드 같은 경우를 보면 어느 정도는 맞는 소리긴 하지만)는 일종의 환상 때문에 그걸 다시 "독일인에게 빼앗아 주면"된다고 생각한 문제인 거다.
또한 후자의 경우 토지에 대한 명분을 가진 인종주의적 학살이라고 보면 된다. 즉, 홀로코스트가 학살 그 자체가 목적이었다고 보이는 이유는 그 수단을 종합적으로 써먹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뒤집어 말하면 그 안에도 영토 획득을 하면서 벌어진 인종주의적 관점의 학살행위와, 인종 그 자체를 학살하던 행위라는 점으로 나눠 볼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겠다.
게다가 여기에 대해서는 다른 자세한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나치는 애초에 "우월한 아리아인종"의 씨를 받겠다고 일종의 짝짓기를 시켜먹은 전례도 있을 정도였으니까.
또한 프로파간다의 성격상 나치당의 정책 자체를 손바닥 뒤집듯 뒤집을 수도 없었을 뿐더러 당내의 좌파적 성격을 지닌 SA출신 집단 등의 계보를 생각해 보면 당연하지만 뭔가 증오의 타겟이 필요했던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유대인이 특별했던 거다.
물론 후대의 학자들은 이에 대해서 "독일이 유대인들을 탄압한 것 자체가 경제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쳤으므로 경제적 이유로 유대인 학살의 이유는 없었다"는 결과론적 관점을 제시할 수는 있지만, 애초에 실패한 경제정책의 경우 그것이 실패할 줄 알고 저지르는 예는 얼마 없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너무나 간단히 홀로코스트를 '히틀러의 유대인에 대한 과대망상증에 가까운 혐오와 증오 탓'으로 치부하고, 또한 그렇게 치부하기를 원하나, 홀로코스트의 정확한 원인과 이유는 학자들 사이에서는 아직도 끝나지 않은 논쟁거리일 것이다.
우선, 홀로코스트는 나치에 의해서만 이뤄진 것은 아니다.
제2차 대전 당시 나치군 점령지에서 유대인들을 솎아내는 과정에서 나치군 점령지의 사람들은 대개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고, 일부는 직접 나서서 유대인들을 고발하기도 했다. 유대인, 집시, 장애인들을 향한 유럽인들의 혐오와 불신은 뿌리깊은 것이었고 비단 나치 독일만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보편적인 유대인에 대한 혐오감이 독재하에서 잔인한 방식으로 표출된 것뿐으로, 유대인을 향한 혐오 자체는 유럽 내의 어느 국가든 존재했다.
당시 유럽인들은 유대인들을 자신들의 거주구역에서 쫓아내고 그들의 재산을 빼앗아 나눠주는 것에 아주 찬성하였으며, 유대인들을 죽이는 것에 대해서도 그저 방관했다. 대학살은 절대 비밀스럽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자랑스럽게 광고해대지만 않았을 뿐이지 시골에서 소식도 안 듣고 사는 사람이 아니고서야 누구든지 수용소로 끌려간 유대인의 운명이 어떻게 되는지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음에도 그저 유대인이 싫어서, 또는 포상금이 탐나서 유대인들을 고발했던 것이다. 이 때문에 나치당뿐만 아니라 유럽 각국들도 홀로코스트의 공범이라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유럽의 반유대감정은 중세까지는 그리스도교의 영향이 있었고, 근대에는 만민평등사상이 널리 선포되어서 각종 제도적 차별이 철폐되면서 유대인에 대한 차별이 없어짐과 동시에 국민국가의 등장, 산업화에 의한 사회변화가 맞물려서 반유대주의가 인종주의적이고 강경한 형태로 부활했다고도 볼 수 있다. 스페인의 유대인 추방이 종교와 맞물린 형태라면, 프랑스의 드레퓌스 사건 같은 경우에는 근대적인 형태, 폴란드, 러시아의 포그롬은 양자가 복합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홀로코스트를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살해방법은 치클론 B를 이용한 가스실이다.
나치는 살해대상들을 "정리"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모색했다. 처음에는 일반적인(?) 살인법처럼 주로 구덩이를 파고 총살을 시켰다. 하지만 이 방법은 곧 한계에 다다르게 되는데 전쟁 통에 귀한 총알을 사형에 쓰느라 낭비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하루에 수십, 수백 명을 쏴 죽인 SS대원은 PTSD 증상을 호소했고, 지휘부는 이들의 고충을 받아들여 다른 방법을 모색하기로 했다.
그래서 생각해낸 아이디어가 바로 가스였다. 이 가스형을 생각하게 된 동기가 무시무시하다. 발터 라우프(Walther Rauff) SS대령이 한적한 교외에서 잠시 차를 멈추고 잠을 청했는데 시동 끄는 것을 깜빡 잊었고, 문득 잠에서 깨보니 배기가스에 중독되어서 사지가 굳어 있어 꼼짝 못하고 죽을 뻔 했는데 정신이 아득한 상황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 탈출하고 이 경험을 토대로 가스형을 개발했다. 최초의 가스실은 배기가스의 일산화탄소를 이용한 방식으로, 지하실 같은 밀폐된 공간에 수감자들을 가두고 꼼꼼히 빈틈을 막은 후 자동차 배기구에 호스를 달아 지하실에 연결한 뒤 열심히 공회전을 돌려 일산화탄소를 발생시키고, 산소부족으로 질식해 죽은 사체를 처리하는 방식이 한동안 유지되었다. 이것이 S트럭이라고 불린 처형 방식이다. 이후 독일은 한창 석유 한 방울이 아쉬울 시절이었고 귀한 석유를 공회전에 낭비하는 것은 타당치 않다는 의견이 생겨 이 방법도 중지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가스실을 이용한 학살은 아주 효율적(?)인 학살방법으로 평가되었는데, 이때 등장한 아이디어가 '치클론 B를 이용하자'라는 것이었다. 치클론 B는 밀폐된 공간에 터트려서 방역을 하는 살충제로, 당시 독일 국방군은 마구간 방역용으로 I.G 파르벤에서 대량의 치클론 B를 납품받아서 석유보다 공급이 넉넉했다.
어찌되었든 치클론 B는 매우 치명적인 독가스였고, 1941년 9월 3일 아우슈비츠 1번 수용소 11번 구역에서 회스 수용소장 등이 참관한 가운데 600명의 소련 포로와 250명의 민간인 수용자를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 치클론 B의 치명성을 본 나치들은(출처:The Encyclopedia of the Holocaust 1권 p113, Jozef Buszko) 이전에 쓰던 배기가스식 가스실보다 더 싼 값에 살해할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뻐 날뛰면서 아우슈비츠뿐만 아니라 점령지 전역에 가스실과 치클론 B를 뿌려대기 시작했다. 물론 치클론 B가 석유보다는 싸기는 했지만 결코 만만찮은 가격의 물건이었는데 그런데도 물자가 아깝다고 하면서도 기어코 독가스를 생산해서라도 죽이려 들었다. 전 유럽과 나라의 존망을 건 전쟁을 치르는 중에도!
여담으로 독일 언론들은 수용소에 대량의 방역용 약품이 공급되는 것을 보고 나치 수용소가 정말 위생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것 같다고 기사를 쓰는 병크를 저질렀다.
종전후 하나도 놀랄 것 없이 유럽에서 홀로코스트는 서서히 잊혔다.
이만큼 거대한 사건이 그토록 쉽게 잊힐 수 있다는 것은 얼핏 이상한 소리로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지난 한국전쟁이나 4.3 사건 당시에 그토록 무수한 학살을 겪었으면서도, 막상 우리가 기억하는 학살은 지나치게 추상적이고 단순화되어 있지 않은가. 무수한 학살이 이뤄졌던 많은 장소들은 현재 평범한 아파트 단지이거나 시가지의 일부가 되어 있고,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 장소에서 학살이 일어났는지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고, 알지도 못한다. 그러한 상황이 전후 유럽 전체에서 일어난 것이다. 전쟁은 많은 사람을 죽게하고, 한국전쟁이나, 2차대전 처럼 너무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죽어나간 전쟁에서는, 살아남은 사람들은 하루라도 빨리 전쟁의 상처를 잊고자 한다. 전쟁의 많은 면들이 연구의 대상이 되었지만 이러한 학살에 대한 연구는 거의 진행되지 않았다. 이는 비록 민간에서의 연구에 국한되며 전범재판 등을 위한 사실파악은 꾸준히 이뤄졌지만, 이렇게 얻어진 사실은 널리 알려지지도, 알려지게 할 의지도 없었다. 서서히 음지로 묻혀가던 학살의 기록들에 대한 관심을 되살린 것은 학살수용소에서 생존한 생존자들이 직접 제작한 영화나 다큐멘터리, 그리고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인 역사가들 덕분이었다.
70년대에 들어서면서 중동 각국의 친소련화가 심화되고 미국의 대 중동전략이 변화되면서 이스라엘의 중요성이 강화되자 홀로코스트는 새로운 조명을 받았다는 해석도 있다. 또, 유대인 학살 문제에 지나치게 관심이 집중됨으로써, 다른 학살들이 외면되는 문제가 발생한다는 비난도 존재한다. 당장 2차대전 당시에 소련인들은 약 3000~4000만, 중국인들은 약 2300만이 죽었다. 또한 서유럽에서도 엄청난 인구가 죽었다. 유대인들은 대체로 600만이 죽었다고 추산되는데 대중은 유대인 학살에만 관심을 갖지, 더 많은 수가 죽은 그 이외의 학살이나 집시, 장애인, 동성애자에 대한 홀로코스트는 유태인 홀로코스트만큼의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당장에 2차대전 하면 딱 홀로코스트를 떠올리는 사람은 많지만, 오라두르쉬르글란 학살이나 벨라루스 초토화작전, 볼라 학살, 네덜란드의 대기근, 노르웨이의 레벤스보른 사건을 떠올리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비단 제2차 세계 대전뿐만 아니라, 예컨대 미국 워싱턴에 홀로코스트 메모리얼 박물관을 개관할 때 미국 원주민들은 그 앞에서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정작 인디언들을 몰아내고 그들을 학살한 땅 위에 건설된 미국이 그에 대한 기억은 배제하면서 멀리 유럽에서 일어난 유대인 학살을 추모한다는 것은 위선이라는 것이었다. 다른 학살은 외면하고 오직 유대인 학살만을 강조하는 경향에는 미국 언론의 영향력도 결코 빼놓을 수 없다. 미국 언론들의 절대다수가 유대계이며 이들은 당연히 이스라엘에 호의적인 여론을 형성하기 위해 홀로코스트만을 강조했다. 유대인의 3~4배에 가까운 희생자를 낸 소련과 중국이 미국의 주요 적국이었다는 점도 이러한 성향을 더욱 더 부채질했으며, 결국 우리가 제2차 세계 대전의 학살이라고 하면 홀로코스트만을 떠올리게 되는 주요한 계기가 되고 말았다.
한편 사상적인 면에서도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고도로 합리적인 관료 체계, 과학과 기술이 발달한 독일에서 이러한 기술을 활용하여 매우 합리적이고 산업적인 방식으로 인간을 학살하였다는 사실은 유럽 여러 학자들의 문제 의식을 자극하였고, 특히 프랑크푸르트 학파로 불리는 일군의 철학자들은 이렇게 목표의 정당성을 생각하지 않는 도구적인 합리성과 이성의 부정적 측면을 비판하는 작업을 수행하며 유명한 저서를 다수 남겼다. 이것이 사회 교과서에서 나오는 실질적 법치주의와 형식적 법치주의의 예시, 뉘른베르크 법이 어떤 방식으로 처리되었는가에 관련되어 있다. 프랑크푸르트학파 이외에도 한나 아렌트는 홀로코스트 문제로 이후에 체포된 아이히만 공판을 보고 기록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쓰기도 하였다. 또한 이는 모더니즘에 대한 회의를 낳으면서 포스트모더니즘을 일으키게 된다.
일부에서는 홀로코스트가 과대평가되었다는 비난도 있다. 그 중 한 가지 원인은 동구권의 몰락인데, 얼핏 듣기에는 상관이 없을 것 같지만 동구권의 몰락은 유대인 문제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 동독이 대표적인 경우지만 이들은 반나치즘을 국시처럼 내세우면서 유대인 학살 문제 등을 과장하면서 자신들의 문제점을 희석시키려던 경향이 있었다. 이 때문에 동구권 몰락 후 아우슈비츠의 희생자 수가 300만이라고 기록되어 있다가 정정되는 등의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면서 나치즘의 반공산주의적 측면이 부각되면서 일부에서는 재평가되는 경우도 있다. 다만, 착각하지 말것은 이러한 주장을 하는 학자들은 네오 나치가 아니다.이들 역시 네오 나치와 나치가 행한 여러 만행에 대해선 의견을 같이한다. 이들이 주장하는 것은 홀로코스트로 인해 학살당한 사람들의 정확한 수치가 알려진 것과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 당시 독일의 여건 등을 고려해보면 이와 같은 주장이 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또 다른 비판으론 미국이나 영국, 프랑스 등 국가들도 제노사이드를 행했는데 나치의 유대인 학살만 들먹이냐는 내용이다. 영국과 프랑스 등 대규모 식민제국 외에도, 그 작은 벨기에조차 콩고에서 고무 등의 자원확보 과정에서 나치보다 더 많은 1천 5백만 명의 사망자를 냈으며 그 외에도 소련, 중국, 터키, 폴란드, 이라크, 이란, 스페인, 포르투갈, 몽골, 북한, 이스라엘 등에서 제노사이드가 발생해왔다. 상기한 워싱턴 홀로코스트 기념관 설립식에서 미국 원주민에게 행한 만행들은 사과하지 않고 유대인의 아픔을 기억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냐던 외침은 쉽게 묵살할 것이 못 되는 것도 사실이다. 미국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원주민들에 대한 강제이주 및 학살에 대한 범죄를 갖고 있다. 영국이나 프랑스, 소련도 아무리 못해도 2,000~3,000만 정도로 추정하고 있다. 실제로 어느 팔레스타인 역사학자는 "현재 미국을 비롯한 강대국들은 나치의 홀로코스트만 들먹이며, 정작 나치처럼 학살한 자신들의 과거는 합리화시키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런 결과의 이유로는 가해국과 피해국의 선진국 여부와 세계적 영향력 때문이라는 말이 있다. 홀로코스트의 주요 피해자 중 하나인 유대인은 미국에서 강한 경제적 영향을 행사하고 있으며, 대영제국이나 프랑스 식민제국 등 여러 굵직한 식민제국들은 현대에도 선진국이거나 강대국으로서 강한 지위를 행사하는 반면 피해국들은 우리가 듣도 보도 못한 곳도 많을 정도로 현대의 약소국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국제적인 지위도 낮고 국력도 약하니 조명을 받지 못 하는 것. 홀로코스트를 일으킨 당사자들이었던 독일도 제2차 세계 대전과 홀로코스트에 대해서는 기억하고 사과한다고 하지만 나미비아 문제에 대해서는 입 닦고 회피하려 들고 있기도 하고. 쉬운 이해를 위해 유럽에 무슨 나라가 있는지, 아프리카에 무슨 나라가 있는지 각각 나열해보자. 전자가 훨씬 쉽지 않은가? 사실 이것만이 아니라도 선진국에서 일어난 일에 비해 약소국에서 일어난 일은 별 관심을 끌지 못하는 경우가 매우 많다. 예시로 2015년 11월 파리 테러 때도 이런 비판이 있었다.
그러나 이것이 인류역사에 가지는 의미를 고려한다면 확실히 잊지 말아야할 중대한 사건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다만, 우린 홀로코스트와 함께 문명과 진보의 이름으로 일어났고 일어나고 있는 수 없이 많은 다른 학살 역시 기억해야 할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폴 포트나 천안문 사태등이다.
동성애자들은 독일에 남아있던 동성애자 처벌법(소도미법 또는 계간죄)인 형법 175조로 인해 나치의 강제 수용소에서 해방되자마자 다시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그것도 나치가 모았던 정보를 토대로 말이다. 독일 형법 175조는 1969년이 돼서야 사문화됐고 1994년이 돼서야 공식적으로 형법에서 삭제되었다. 2002년이나 돼서야 독일 정부는 동성애자 커뮤니티에게 사과했고, 형법 175조에 의한 피해자 구제는 2016년 현재 진행형이다. 베를린의 브란덴부르크 문 옆에 가면 1만 9073㎡의 부지에 콘크리트 비석 2,711개가 설치된 '학살된 유럽 유대인을 위한 기념비'가 있는데, 동성애자 홀로코스트 추모비는 길 건너 티어가르텐 한가한 구석에 코딱지만 하게 설치되어있다.
또 한 가지, 홀로코스트에 대해 보이는 일부 유태인들의 입장 역시 씁쓸한 면이 있다. 워싱턴의 홀로코스트 메모리얼 박물관 건립 당시 추모비에는 홀로코스트로 인한 희생자의 숫자가 1,000만 명으로 기재될 예정이었다. 그런데 미국 내에 거주하는 유태인들의 강경한 반대로 인해 결국 해당 추모비에는 희생자가 600만 명으로 기재되었다. 문제는 1,000만 명과 600만 명이라는 희생자 수의 차이가 나치 독일의 수용소에서 희생당한 모든 사람의 수를 합친 경우와 유태인 희생자의 수에 한정한 경우의 차이라는 것. 즉, 미국의 유태인들은 홀로코스트 메모리얼 박물관의 추모비가 유태인뿐 아니라 집시, 폴란드 등 동유럽인, 동성애자, 나치에 반항한 정치범 등 모든 희생자를 기리는 것을 거부하고 오직 유태인만을 추모하는 추모비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하지만 2016년 현재 모든 희생자를 언급하고 명시되어 있다. 이건 와전된 이야기 아트 슈피겔만의 쥐: 한 생존자의 이야기에서도 인종차별적인 면모를 보이는 미국 거주 유태인들의 모습을 비판적으로 묘사한 바 있고, 이 일화를 국내에 소개한 한양대학교 사학과 임지현교수 역시 이런 유태인들의 배타적 태도를 비판한 바 있다. 또한, 임 교수의 저서에 따르면 유태인들의 배타적 태도가 반드시 외부 집단에 한정되었던 것도 아니고, 시오니즘 운동에 참여하여 팔레스타인에 이주했던 유태인들이 전후 이스라엘의 건국 과정에서 유럽에 잔류했다가 홀로코스트에 희생된 유태인들에 대하여 보인 우월의식에 대하여 비판한 바도 있으니 참고할 만 하다.
홀로코스트란 역사적 사건은 분명 다시는 있어선 안 될 참극임에는 분명하다. 그러나 최근에는 홀로코스트를 산업화 시켜서 이데올로기적 무기로 사용한다는 비난여론도 나온다. 미국 유대인 로비단체들이 학살된 유대인들의 유럽은행 예금이나, 몰수된 재산과 미술품 등에 막대한 손해배상을 청구해 받아내 상당액수를 유용하거나 하는 문제가 지적된 바 있다. 한국에서도 출판된 <홀로코스트 산업>을 보면 지은이 노르만 핀켈슈타인 또한 조부가 아우슈비츠에서 학살된 유태인임에도 이스라엘이 홀로코스트를 들먹이며 일부의 배만 채운다고 강력하게 비난하며 여러 자료를 내보이고 있다. 게다가 홀로코스트를 핑계삼아 이스라엘을 건국한 시오니즘 유태인들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하는 진상짓도 결코 좋게 봐줄 수 없다. 더욱이 현재 세계에서 가장 막강한 권력을 지닌 미국의 언론을 주도하는 세력이 유대인이기에 이 점을 고의적으로 우회하고 그들의 적인 아랍인의 잘못만 들춰서 비난하는 여론 조장에도 상당한 한몫을 한다. 이쯤되면 오히려 막나간다고 욕해도 모자랄 판으로 보인다. 역사적 문제는 역사적 문제이고, 현재는 현재임을 유대인들은 자각해야 할 것이다.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자면 팔레스타인 문제와는 또 다르다. 역사적 문제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느냐 아니냐가 문제이다. 유대인은 전자이고, 팔레스타인은 후자다.(이스라엘은 전자지만) 그렇기 때문에 학자들 중에서도 '역사적인 진실을 법적인 진실로 만들 필요가 없다'라며 반홀로코스트 부정법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리고 제3제국이 홀로코스트를 일으켰기 때문에 나쁜놈이라고 하면서도 다른 제국주의 국가들의 악행에는 무관심하거나 심드렁하다는 것 또한 문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