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령 시대에 벽속에 숨겨두었던 위스키가 나왔다.
시작은 사회적인 이유와 종교적인 이유에서였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반은 구미권에서 사회 개선 운동이나 도덕 재건 운동이 일어나는 시기라 마침 금주 운동도 최고 고조의 시기였다. 이미 유럽 각국에서는 금주 운동 단체가 출범했으며 영국에서는 1835년에 전국 절대 금주 교회가 출범하여 금주 집회가 열었다. 또한 술의 대안으로 홍차를 밀면서 금주 운동은 전세계로 퍼졌으며, 19세기 후반에 스위스, 독일, 프랑스, 러시아, 일본 등에서도 금주 단체가 성립하게 되었다.
사실 미국은 술을 그야말로 퍼 마시는 국가였다. 전세계에서 몰려든 여러 이민자들의 다양한 문화들이 물자가 풍부한 미국땅에서 섞이면서 시너지 효과를 일으켜서 뭐든 크고 아름답게 만들던 기조가 음주 문화에도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1700년까지 식민지 사람들은 발효된 복숭아 주스, 진한 사과 사이다, 럼주를 마셨다. 이들은 대부분 서인도 제도에서 수입하거나 서인도 당밀을 증류해 만든 것이었다. 술은 문화의 중요한 부분이었고 사람들은 바베큐, 장날, 선거 때마다 술 주전자나 술이 든 그릇을 지나치는 법이 없었다. 선거 후보자들은 공짜 술을 나눠줬고 이에 인색한 후보자는 이길 기회가 없었다. 심지어 금욕적인 뉴잉글랜드 사람들도 술을 많이 마셨다. 청교도들은 알코올을 ‘신의 선한 창조물’이라고 불렀다. 자랑스럽지만 조심히 다뤄야 한다는 의미에서였다.
1770년이 되자 미국인들은 매 끼니마다 술을 일상적으로 마시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이 '눈뜨개'로 하루를 시작하였고, 술 한 잔으로 하루를 마무리했다. 갓난아기(!)를 포함한 모든 연령대의 사람들이 술을 마셨는데, 아기들은 부모들의 럼 토디 머그잔 바닥에 설탕이 많이 든 부분을 다 마셨다. 한 사람당 연간 3.5갤런 정도의 알코올을 소비했다. 참고로 여기서 3.5갤런 알코올은 일반적인 술 3.5갤런이 아니라 순수 에탄올 3.5갤런을 뜻한다. 미국 혁명이 일어날 무렵에 평균적인 사람이 80프루프짜리 술을 연간 8.75갤런 마신다는 것인데, 현재 소비 수준보다 45퍼센트 높은 수치.
그래도 당시는 고위층이 주로 술을 마시는 편이었다. 건국의 아버지들도 종종 술을 마셨는데 오크렌트의 책에 의하면, 워싱턴은 농장에 증류기를 가지고 있었고, 존 애덤스는 매일 진한 사이다를 들이마시면서 하루를 시작했고, 토머스 제퍼슨은 와인 수집뿐만 아니라 자기가 직접 호밀을 길러 위스키도 만들 정도였다. 제임스 매디슨은 매일 위스키를 한 파인트씩 마셨고, 미합중국 육군 사병들은 1782년 이래로 매일 배급의 일환으로 4온스의 위스키를 받았고 조지 워싱턴 자신은 '강한 주류의 온건한 사용으로 인한 이점은 모든 군대에서 경험되었으며 이는 논쟁의 여지가 없다.'고 말했으며 실제로 선거 유세하면서 사이다랑 맥주를 돌렸었다. 메사추세츠 지사였던 새뮤얼 애덤스는 주류사업에 관여하고 있었다.
그리고 1800년대가 되자 영국이 노예제도와 관련됐다고 미국의 럼주 생산과 당밀 생산에 참여를 중단했고 미 연방 정부는 럼주에 세금을 물리기 시작한다. 럼주의 소비가 그렇게 해서 줄어드는 와중 중서부 지대에 이른바 '옥수수 벨트'가 생기게 됐는데 옥수수를 운반하다가 상하는 걸 막기 위해서 농부들이 아예 옥수수를 위스키로 만들어서 팔기 시작한 것이다. 이 옥수수로 만든 버번 위스키 덕에 1820년대에는 위스키가 25센트밖에 안 하게 되었다. 당시 차나 커피, 와인, 맥주, 심지어 우유보다 더 싼 가격이었다. 거기에 영국 해군의 준사관 이하에게 희석한 럼주를 매일 지급하던 관행을 그대로 따르던 미합중국 해군과 미합중국 해안경비대 역시 비싸진 럼 대신 버번을 납품받아 지급하는 것으로 바꾸면서 위스키 소비가 폭증하게 되고, 규모의 경제 덕에 단가가 계속 싸지면서 전국적으로 증류소가 5배 이상 증가하게 된다.
당시 위스키 소비가 어느 정도였냐면 도시에선 노동자가 주말 동안 퍼 마신 술 때문에 숙취에 절어서 월요일에 직장에 못 나와도 이해해줬을 정도였다. 그리고 1830년에는 마을 종이 11시와 오후 4시마다 울렸는데 그 이유가 '그로그주 마실 시간'을 알려주기 위해서였다.
당시 영국인 여행자였던 프레데릭 마얏은 저서인 'A Diary in America'에서 “미국인들은 술 한 잔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거다. 누군가를 만나면, 술을 마셔야 한다. 헤어지면, 마셔야 한다. 당신이 누군가와 친분을 맺으면, 마셔야 한다. 당신이 거래를 끝내면, 마셔야 한다. 만약 싸우게 되면, 마셔야 한다. 화해하게 되면, 마셔야 한다. 날씨가 더우면, 마신다. 날씨가 추워도, 마신다. 선거에 성공하면, 마시면서 기뻐한다. 그렇지 않으면, 마시면서 욕을 한다. 그들은 아침 일찍 술을 마시기 시작하고, 밤늦게 떠난다. 그들은 태어날 때부터 마시기 시작하고, 곧 무덤에 갈 때까지 마신다."라고 묘사했다. 1830년이 되면 1인당 80프루프짜리 술을 1주마다 1.7병씩 마심으로써 연간 순수 에탄올 섭취량이 7갤런에 달했다. 어쨌거나 이런 기조가 1900년대 초까지 계속돼서 수정헌법 18조가 나올 만했다. 단지 그게 지나쳐서 금주를 권유하는 정도가 아니라 강제했다는게 문제였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