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부극의 대부 '존 웨인' 사망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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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극의 대부 '존 웨인' 사망 이유


2021. 6. 6.

미국의 배우. 클린트 이스트우드, 게리 쿠퍼와 더불어 일명 서부극의 대부였으며 AFI(미국영화협회) 선정 가장 위대한 남배우 13위에 올랐다.



할리우드 역사상 가장 미국적인(?) 배우이다. 실제로 배우 본인이 생전에 추구했던 이미지가 많은 미국인들이 선호하는 마초성 강한 Badass였으며 존 웨인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서부극 역시 당시 미국인들이 가장 선호하던 전통적인 장르였다. 그래서인지 현재까지도 미국인들을 대상으로 가장 인지도 있는 클래식 할리우드 배우를 뽑으면 존 웨인이 최상위권에 랭크하는 경우가 많은 편. 배우로서의 종합적인 평가나 업적을 떠나서 순수한 인지도에 있어서는 미국인들 머릿속에 가장 깊게 자리잡은 클래식 배우. 물론 연기력이나 남긴 작품들로 봐도 클래식 할리우드 배우들 중에서 손꼽히는 배우이다.

194cm의 큰 키로 미식축구 선수 출신이다. 본래 20세기 폭스 영화사의 소품담당 스태프로 일하다가 B급 영화 전문 배우로 활약, 이후 존 포드 감독을 만나고 포드 감독은 그를 단역배우로 기용하다가 주연을 맡겼고 이후로 그는 승승장구한다.



대부분의 영화 내용이 지금 보면 뻔한 스토리의 서부극인데 모든 작품이 그런 건 아니다. 이를테면 그가 나온 영화에서 미국 원주민을 꽤 긍정적으로 그린 "아파치" 같은 영화도 있고 백인이 더 악랄하게 나오던 수색자(The Searchers/1956) 같은 영화는 할리우드 불멸의 걸작으로 꼽힌다. 수색자는 개봉 당시 욕 무지 먹고 매장되었다가 웨인이 죽고 난 뒤에서야 재평가되었다. 아무래도 당시 시대에는 백인이 악랄하게 나오는 경우를 받아들이기 어려워서인지 평이나 흥행은 참혹했다. 지금은 시대를 잘못 만난 걸작이라고 불린다.

월간 플래툰지의 필진 니미셀은 웨인을 다른 장르의 영화도 서부극으로 만드는 사나이라고 할 정도다. 서부극이 아닌 전쟁영화 혹은 서커스단의 단장으로 나온 영화들도 서부극의 포스를 풍긴다. 심지어는 칭기즈 칸으로 나온 영화까지 그렇다.

게리 쿠퍼에 라이벌 의식이 있던 것으로 보이며 그가 출연한 '하이 눈'을 평가절하했다고 한다. 이후 자신과 같은 성향을 가진 하워드 혹스 감독과 함께 '리오 브라보'를 만든다. 참고로 혹스 감독도 하이눈 까. 후세에선 하이 눈, 리오 브라보 모두 걸작으로 평가 받고있다. 25회 아카데미시상식에서 쿠퍼의 최고 걸작으로 하이눈을 언급하면서 자기에게 캐스팅 제의가 오지 않은 게 아쉽다고 말하기도 했다.

2차 대전 당시에도 상당히 많은 전시 선전영화에 출연했다. 그 중에서도 작품성이 존재하는 것은 "싸우는 해군공병대(The Fighting Seabees)"와 "날으는 호랑이들(Flying Tigers)" 정도. 웨인 사후 이 작품에 "유황도의 모래(Sands of Iwo Jima)"를 추가해서 3부작으로 컬러 작업을 해서 비디오 및 DVD로 출시되었다.

베트남 전쟁을 매우 지지하였기에 베트남전을 배경으로 한 '그린베레'라는 영화를 감독하고 당연히 주연으로 출연하였다. 베트남전이 한창일 때 만들던 영화이자 실제 그린베레 대원의 수기를 바탕으로 만들었으니 베트콩은 무조건 악. 미군이 이기며 전쟁 홍보영화라는 평을 듣고 있다. 하지만 정치성향을 제외하면 의외로 재미 있어서 유럽에서는 앞부분 기자들과 이야기하는 정치성이 농후한 장면을 삭제한 채 개봉했다...로빈 무어 원작의 '그린베레'라는 원작을 느슨하게 영화화 했으며 배경이 되는 연대는 1965년 미군의 본격적 개입 이전의 시기이다.

그런가 하면 이 영화 삽입곡인 '발라드 오브 그린베레'는 당시에 꽤나 유명곡이 됐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정작 그린 베레 대원들은 그다지 안좋아했다고 한다. 당시 인기있던 곡 중 매우 드물게 군에 대해 긍정적인 시각으로 보는 노래였지만 문제는 노래 가사가 전사하는 그린베레 대원이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아내에게 '기장을 아들 가슴에 달아주고 미국 최고의 그린베레 대원으로 만들어 달라'란 유언을 전해달라는 내용이다. 당연히 좋아할 리가 없다. 당시의 실제 그린 베레 대원들의 수기를 보면 가끔 이 영화와 존 웨인이 언급이 되는데 영화는 그저 그랬지만 존 웨인은 멋있다는 반응이 많다고 한다.

유황도의 모래는 49년작 흑백영화였다. 저걸 보고 자원입대한다는 건 굉장히 영화 마니아였다는 것이다. 아니면 옛날 영화들을 싸게 틀어주는 허름한 극장에서 봤을 수도 있다. 이 유황도의 모래는 일본군과 싸우는 미 해병대를 다루는 내용으로 저 병사의 후일담도 있다. 위문공연 온 배우에게 면박을 줬다는 이유로 나중에 정신적 압박을 받았다. 왜냐하면 병사들이 제일 신나는 때가 위문공연할 때인데 그때 분위기를 깼으니...

영화의 성향도 백인우월 인종차별적인 것이 많아 욕 먹을 거리기 되는데 당시 서부극을 비롯한 미국 영화, 아니 미국 사회가 그랬던 거지 존 웨인이 특별히 그런 영화에만 골라 나간 건 아니다. 반대 성향의 영화에도 꽤 나왔다. 몽골을 그리면서 존 웨인을 포함한 주요 배역이 모두 백인이었던 화이트워싱을 한 영화 정복자(국내 제목 칭기즈 칸) 같은 건 심하긴 했지만 말이다.

그의 마지막 영화는 마지막 카우보이(1977/월간 키노에선 이 제목으로 소개되며 암으로 죽는 총잡이로 소개되었다.)였다. 이 영화에서 암으로 죽어가는 총잡이로 나오는데 공교롭게도 그는 진짜 암으로 죽었다. 그래서인지 죽기 얼마전에 자신도 그걸 언급하면서 지인들에게 내가 죽기 전에 마지막 고른 영화가 내 미래를 상징했을 줄 몰랐다는 말도 했다고 한다...마지막 카우보이는 돈 시겔 감독의 영화로, 한국에는 '최후의 총잡이'(원제 : The Shootist, 네이버 영화에서는 마지막 총잡이로 등록)란 제목으로 수입되었다.

(DVD 이야기) 초반부에는 웨인이 찍었던 서부영화들이 조금씩 나온다. 하지만 주인공 J.B 북스(존 웨인)는 암으로 죽어가는 건 사실인데 죽을 때 모든 원한관계를 정리하려고 총싸움을 하다가 기습으로(더블 배럴 샷건) 맞아죽는다. 그런데 황당하게도 제임스 스튜어트가 의사로 출연한다.

사실 존 웨인 영화의 정리판은 앞에서 언급한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로 보면 된다. 시대와 함께 쓸쓸히 퇴장하면서 영웅으로 남기를 거부하는 인물은 존 웨인 최고의 연기력을 보여준다.





터프한 이미지와 상반되게 병역을 기피한 군 미필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징병 대상이었지만 연령과 부양가족 때문에 면제를 받았고, 대중적 인기를 고려해 지원입대를 공언했음에도 한편으론 영화 한 편만 찍고 입대하겠다며 전쟁이 끝날 때까지 계속 지원 입대를 연기했다. 비슷한 나이에 자원 입대한 영화배우 헨리 폰다나 제임스 스튜어트와 비교하면 겉모습만 터프한 겁쟁이인 셈이라 나중에 이 문제로 평생 후회했다.

스파게티 웨스턴에 출연한 클린트 이스트우드에게 "피자나 먹으려고 이탈리아로 갔냐?"라고 했다. 하지만 꽤 당찬 성격인 이스트우드는 되려 "선배님은 그럼 늘 햄버거만 먹습니까?"라면서 반격했고 웨인은 피식 웃으면서 물러났다고 한다. 월간 키노에서 할리우드 스타들 대사로 나온 바 있다.

열성 공화당원인 것과는 별개로 극우 성향을 보이기도 했다. 매카시즘의 찬성파로 까이기도 했고 인종차별주의적인 발언을 해서 물의도 빚었다. 1971년 플레이보이지와의 인터뷰에서 "난 흑인들이 책임을 질 수 있는 교육을 받을 때까지 백인우월주의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또한 우리는 광할한 이 땅을 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 부당하게 취했다는 느낌마저 들지 않고 이 땅은 많은 사람들을 필요로 한데 인디언들은 이기적으로 차지하려 하고 있다."고 말한 것이다. KKK 소속이거나 거기 간부와 잘 안다는 소문도 많았는데 그것만은 절대 아니라고 부정했다. 그래도 엘리아 카잔처럼 위증이나 무고죄를 저지르지는 않았기 때문에 매카시즘으로 심하게 비난받지는 않는다.

그래서 2020년 조지 플로이드 시위로 인한 인종차별 재조명 중 존 웨인 동상 철거 요구가 등장했다. 이에 아들이 반박하는 등 갑을논박이 벌어지고 있다.

웨인은 심지어 자신과 데이트를 한 여자들을 영화에 기용하도록 압력을 넣었다는 말도 있었고 세금 탈세 혐의도 있다든지 여러 모로 안 좋은 일로 욕먹을 짓도 좀 저지른 바 있다.

성격도 좀 욱하는 면이 커서 자신과 비슷한 정치관을 가지고 탈세라든지 여러 모로 논란이 큰 후배 프랭크 시나트라와 사이가 안 좋았다. 한번은 웨인이 머무른 호텔에 바로 시나트라 일행이 머물며 신나라 잔치를 하는데 웨인이 잠 좀 자자고 짜증내자 시나트라는 경호원을 내보내 내쫓았다. 그러자 분노한 웨인은 의자를 갖고 와 그 경호원을 내리쳐 기절시켜버렸다고 한다. 그리고 또 의자로 맞고 싶은 개색히 있냐고 일갈하는 통에 시나트라는 깨깽...

미국 캘리포니아 주 오렌지 카운티의 오렌지 카운티 공항은 이 사람의 이름을 따서 존 웨인 공항으로 불린다. 이 분이 말년을 보낸 곳이 공항 근처의 뉴포트 비치였기 때문이다.

홍콩계로 미국에서 활동중인 조이럭 클럽, 슬램댄스의 영화감독 웨인 왕은 바로 존 웨인 영화를 좋아하던 아버지가 지어준 이름이라고 한다. 정작 자신은 "존 웨인 영화 싫어하는데..."라며 쓴 웃음 지은 적도 있다고 한다.

빈센트 반 고흐를 유난히 싫어했다. 'Lust For LIfe(열정의 랩소디,감독-빈센트 미넬리. 1956년작)'에서 영화에서 고흐 역을 했던 후배 배우 커크 더글라스에게 "그딴 미치광이 역은 왜 했냐!"고 핀잔을 주기도 했는데 정작 커크 더글러스는 이 고흐 역을 위해서 고흐에 대한 책자도 엄청 읽어보고 연구도 하면서 연기하여 골든글로브 남우주연상까지 받았는데 선배가 이런 말을 하니 무척 기분나뻐했던 건 물론이다. 그뿐 아니라, 이 영화에서 고갱 역을 맡아 아카데미 남우조연상까지 받은 배우이자 실제 화가이기도 한 안소니 퀸은 이 말을 듣고 치를 떨었고 살아 생전 존 웨인을 엄청 싫어했다고 한다.

대체 역사 소설 타임라인-191 시리즈에서는 잠깐 언급만 된다...대체 역사 세계에서 2차 멕시코 전쟁의 영웅이자 현직 대통령인 시어도어 루스벨트 전문배우로 북부에서 활약 중. 본편에서는 실명으로 언급만 돼서 자세한 사항을 모르면 그냥 지나치기 쉽다.

위에서도 언급됐다시피 그의 사망 원인은 암이다. 영화 '징기스칸'을 촬영한 무대였던 미국 황무지/사막지대가 당시 미군이 핵실험을 한 장소들과 가까웠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있다. 당시에는 잔류방사능에 의한 후유증이나 발암에 대한 인식이 미비했다. 그러나 존 웨인 자신은 이러한 소문을 믿지 않았고 그저 매일 담배 6갑을 피워서 폐암에 걸렸다고 믿었다. 그렇지만 그는 원발 폐암은 시대를 고려하더라도 순조롭게 극복했고 사인이 폐암도 아니었다. '징기스칸' 찰영 당시 같이 있었던 스태프 220여명 중 절반 이상이 방사능에 피폭된 후 암으로 사망했기 때문에 이는 꽤 유명한 일화이다. 차트를 달리는 남자에 이 이야기가 나온다.

일각에선 존 웨인의 무덤이 비석만 있는 빈 무덤인 상태이고 워싱턴 DC 지하벙커에 냉동인간 상태인 존 웨인이 안치되어 있다는 의혹을 제기한다.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도 이를 주제로 방송을 한적이 있다. 차트를 달리는 남자에도 이 이야기가 나온다.

1976년, 존 웨인은 흔치 않은 기록을 세우는데, 바로 무려 4000톤짜리 군함을 맨 몸으로 민 것이다. 정확히는 올리버 해저드 페리급 초도함인 FFG-7 '올리버 해저드 페리'(이하 '페리 호'라 지칭)의 진수식이 1976년 9월 25일 한창 진행중에 있었는데, 하필 쭉 밀려 물에 풍덩 빠져야 할 페리 호가 조선대(Slip-way)에서 걸려 멈춰 서버린 것. 미 해군의 하늘을 책임질 최신예 방공 호위함이, 그것도 하필 초도함이 진수식에서 걸리게 된 거다. 뱃사람들로 가득한 해군의 특성상 이는 경악할 만한 일이었고, 몇몇은 "당시 '배가 물을 거부한다' 내지는 '물이 이 배를 거부한다'라고 수근대기 시작했다. 그때 나는 왠지 '이 배가 얼마 안 가 어처구니 없이 가라앉아 버릴 것 같구만'이라는 생각이 들더라."라고 회고할 정도였다. 그런데 진수식에 참관 중이던 존 웨인이 직접 나서서 밀자, 배는 잘만 밀려 바다에 무사히 떴던 것이다. 당시의 음울한 분위기를 존 웨인이 직접 깬 것. 그 덕분인지는 몰라도 페리 호는 1997년 2월 20일 퇴역될 때까지 큰 사건 없이 잘 운용되었고, 기타 자매함들도 여러 사건사고들에 휘말렸을지언정 전량 퇴역이 결정될 때까지 1대도 격침되지 않은 채 적어도 제 밥값은 잘 해냈다. 그리고 일부는 현재도 미국의 몇몇 우방국들의 바다를 잘 지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