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덕왕
신라의 제42대 왕이다. 원성왕의 태자 인겸의 삼남으로 소성왕과 헌덕왕의 아우이며, 애장왕의 숙부다. 생년이 명확한 국왕인데, 흥덕왕릉의 비석이 온전히 남아 있지 않지만 다행히 수명을 기록한 부분이 남아 있다. 여기에 왕이 죽었을 때 60세였다는 기록이 존재하므로 역산하면 그의 생년은 777년.
치세
804년에 시중에 임명되어 언승(헌덕왕)과 함께 애장왕대의 왕권 강화정책을 이끌었다. 819년에는 상대등에 임명되었으며, 822년에는 부군이 되어서 왕위계승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애장왕-헌덕왕으로 이어지는 왕권 강화 정책을 지속적으로 펼쳤으며 828년에 장보고로 하여금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게 하여 당시 복잡했던 국제 정세에 대응하는 자세를 보였다. 왕족 측근 중용을 통한 권력의 집중과 신흥 계급의 수용을 통한 왕권 강화라는 원성왕계의 전통적인 전략을 이은 것이다. 역시 같은 이치로 아우 김충공을 상대등에 임명하고, 숙부인 예영의 아들인 김헌정과 김균정을 중용하였다. 여기까진 좋았는데...
이 왕권 강화를 위한 왕족 우대 전략은 힘을 가진 왕족들의 왕위 갈등을 불러오게 되는데, 그가 자식이 없이 죽자 충공의 아들인 김명과 이찬헌정의 아들인 제륭이 한편이 되고 숙부뻘인 균정이 한편이 되어 왕위 다툼을 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결국 균정은 죽고 제륭이 오르니 이것이 희강왕이다.
다만 흥덕왕 대에도 전왕 대부터 이어진 천재지변의 연속으로 백성들의 삶은 도탄에 빠졌다. 그나마 형보다 나았던 점은 흥덕왕은 음식 수를 줄이고 죄수를 사면하는 등 고난을 백성과 함께 하는 모습(그것이 진심이었든 아니었던든간에)이라도 보여주었다는 점. 또한 남쪽 지역을 순행하면서 백성들을 위무하고 직접 구휼 활동에 나서는 등 민생을 살폈다.
그런데 이 무렵인 834년에 의식주나 생활용품을 골품제에 따라 온갖 사소한 것까지 철저히 규제하겠다는 법령을 내렸다. 예를 들면 의복의 재료, 수레의 크기와 끄는 동물이 몇 마리까지 가능한지, 집의 크기, 장화끈의 재질, 장화의 색깔, 하다못해 여자들이 사용하는 장식용 빗의 재료까지도 평민은 흰색의 뼈나 뿔, 4두품은 나무재질까지 가능, 진골은 에메랄드와 바다거북 껍데기로 만든 빗만 금지 이런 식으로 엄중히 제한했다.
이는 결과적으로 신라 사회에 많은 문제를 일으키던 골품제를 고착화시켜 버렸다. 흥덕왕으로서는 골품제가 안정적으로 돌아가면 기강도 잡히고 신라의 혼란도 가라앉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모양이지만 신라 사회 모순의 근본적 원인이 바로 골품제에 있었던만큼 시대를 읽는 눈은 비교적 떨어졌던 모양. 물론 자신이 골품제 속에서 살아온 인물이니 넓은 시야를 갖는 것은 힘든 일이었겠지만 문제의 원인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다는 점은 아쉬운 부분. 단 골품별 제한을 만든 834년은 그 유명한 장보고와 청해진의 전성기로, 해외무역이 가장 활발한 시기였다. 골품별 제한을 만들 때 내린 교지를 읽어보면 흥덕왕 이전까지는 중하위 골품, 즉 하급 귀족부터 일반 백성층까지도 외래사치품 사용이 만연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에, 흥덕왕의 의도는 본인의 음식 수를 줄이는 것처럼, 아마도 과소비를 방지하려는 목적도 컸을 것이다.
즉위 3년에는 당나라에 갔다온 사신이 차나무 종자를 가져와 그걸 지리산 하동군 일대에 심은 기록이 있는데 이 것이 우리나라 최초로 차를 재배했다는 기록이다. 물론 그 이전부터 차가 재배되었을 수도 있으나, 기록상으로 남아있는 것은 최초이다. 그 이전 시대에는 주로 당나라에서 차를 수입했기에 매우 비싼 물건으로 주로 왕이 하사한다거나 하는 사치품이었는데 흥덕왕 때부터 차 마시는 것이 크게 유행했다고 한다. 지금도 하동 쌍계사 인근에 차나무 시배지가 있으며, 2012년에는 하동 시배지의 차나무를 경주시 흥덕왕릉에 심는 행사가 있기도 했다.
흥덕왕 시기에도 불교는 여전히 성행했음을 알 수 있는데, 즉위 2년엔 승려 구덕이 당에서 경전을 가지고 들어왔으며, 즉위 5년엔 도승 150명을 궁궐로 불러들여 왕의 쾌유를 비는 불공을 드리도록 했다.
장보고에게는 은인과 같은 인물인데 천한 신분인 장보고에게 병권을 주고 벼슬까지 주었기 때문. 흥덕왕 역시 장보고를 크게 신뢰했다. 9세기 신라는 해안가에서의 해적 출몰, 왕권의 약화, 재정부족을 겪고 있었어서 상당한 군권을 쥔 장보고가 대놓고 반란을 일으키면 상당히 큰 문제가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왕 본인이 장보고를 등용, 장보고가 해적을 소탕하고 청해진을 설치해 막대한 재물을 얻었고, 장보고는 이를 신라왕실에 바쳐 재정이 충당되었다. 이로 인해 신라는 동북아무역의 거점이 돼 몇년간 재정이 충당되어 조용했지만 나중에 청해진을 철폐하는 병크를 저질러 멸망을 가속화 했다.
어찌보면 흥덕왕 시기는 반란이 판치고 혼란이 과중되던 시기 중 조용했던 시기이자 어쩌면 신라가 전성기를 맞이할 수도 있었던 시기이다. 일단 왕 본인이 정사에 열정적이었고 인재를 보는 눈도 있었다. 김우징을 시중에 임명했는데 후기에는 복수귀였지만 김우징은 나름 재상으로서 훌륭했다. 또 하찮은 출신인 장보고에게 군권과 벼슬을 주었다. 이에 장보고는 신라의 골칫거리던 해적을 관광태우고 청해를 거점으로 무역을 하였고, 이로 얻은 이득을 신라왕실에 바쳐 재정을 충당할 수 있었다. 그 덕분에 신라는 동북아 무역의 거점이 되었다. 하지만 왕이 애처가였다는 게 문제였다. 일반인이라면 문제 될 게 없으나 그가 한 나라의 군주였다는 것이..그에게는 후사가 없었고 신라는 다시 왕실다툼에 휘말려 혼란이 가중됐고 이 영향으로 자신이 신뢰했던 신하 장보고마저 죽으며 신라는 멸망했다.
애처가
개인적인 면모를 이야기하면 이 왕도 애처가였다. 왕비는 소성왕의 딸인 장화부인(시호는 정목왕후)인데 흥덕왕이 즉위한 지 2개월 후에 죽어 왕을 크게 상심시켰다. 주위에서 신하들이 새 왕비를 들일 것을 권했지만 왕은 "외짝 새도 제 짝을 잃은 슬픔을 가지거늘, 하물며 훌륭한 배필을 잃었는데 어떻게 무정하게도 금방 다시 장가를 든다는 말인가?"라고 말하며 이를 거절하였다. 박씨 성의 후궁이 있기는 했는데 별로 가까이 하지 않았고 궁중의 여성들을 건드리는 일도 없었으며 왕의 주변에는 단지 내시들만 있었다고 한다. 결국 왕은 죽은 후 먼저 떠나보낸 아내 정목왕후의 능에 합장되었다. 뒷날의 공민왕과 비슷한 면모. 흥덕왕 부부의 합장릉 흥덕왕릉은 신라 왕릉 중 다른 설 없이 능 주인이 본인들임이 확실한 몇 안 되는 능 중 하나다.
다만 한 가지 특이한 것은 정목왕후는 소성왕의 딸이므로 애장왕의 누이다. 흥덕왕이 형 헌덕왕의 정변에 가담했던 것을 상기하면 정목왕후 입장에서 남편 흥덕왕은 친동생의 원수이기도 한 셈. 흥덕왕이 아내에 대해 이런 정을 보였던 것은 아무래도 아내에 대한 나름대로의 속죄였을 가능성도 있겠다. 그러나 끝내 후궁을 두지 않아 후사를 보지 못하고 말았는데, 어찌 보면 신라 하대 왕위 쟁탈전의 직접적 원인을 촉발시킨 왕. 근본적 원인은 할아버지에게 있다 하겠지만
《삼국유사》에는 앵무새와 관련한 일화가 전해내려온다. 당나라에 갔다 온 사신이 왕에게 한 쌍의 앵무새를 바쳤는데 오래지 않아 암컷이 죽었다. 혼자 남은 수컷이 애처롭게 울기를 그치지 않자 흥덕왕은 거울을 수컷 앵무새 곁에 걸어두었다고 한다. 그러자 수컷이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자기 짝인 줄 알고 거울을 계속 쪼다가 그림자임을 알아채고 슬피 울다가 마침내 죽고 말았다. 흥덕왕은 이를 보고 노래를 지었다고 하지만 이는 전해내려오지 않는다고 한다. 짝을 잃은 앵무새에 대해 동질감을 느꼈던 듯하며 《삼국사기》에 기록된 위의 '외짝새 이야기'는 이 앵무새를 가리키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