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일
본명 정주일(鄭周逸)
출생 1940년 10월 24일, 강원도 고성군
사망 2002년 8월 27일(만 61세), 경기도 고양시
직업 코미디언, 국회의원
가족 배우자 제화자, 슬하 1남 2녀
특이사항 5대 독자!!
"정치를 종합예술이라고 하지만 코미디라는 생각밖에 안 듭니다. 여기에는 나보다 더 코미디를 잘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4년동안 코미디 공부 많이 하고 갑니다." - 국회를 떠나 방송계로 복귀하면서 했던 명언.
"이한영씨가 피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북한에서 혹시 나까지 표적으로 삼고 해칠까봐) 신변에 불안을 느껴서 서초동 이덕화의 자택에 피신을 하기도 했다." - 한국일보사 刊 자서전 인생은 코미디가 아닙니다 中에서.
"얼굴이 못생겨서 죄송합니다!"
대한민국 코미디의 황제
대한민국의 희극인 본명은 정주일. 가천대학교 경영대학원 졸업. 코미디계의 전설로 남은 인물이다.
어려웠던 1980년대, 국민들에게 웃음을 안겨주는 전설적인 인물로 기억되고 있으며 사후에는 국민훈장 모란장이 추서되었다. 그런데 그 이유인즉, 코미디언으로서의 업적을 인정해서가 아니라 금연운동에 기여한 공로였다. 어쨌건 이주일의 메시지는 역대 금연 광고 중에서도 가장 높은 효과를 냈다고 한다.
이주일식 코미디의 백미는 문장들을 더듬거리며 말하다가, (시청자의 예상을 뒤엎는 타이밍에) 실없는 소리를 툭하고 던져서 의표를 찌르는 것이다. 즉 얘기를 시작하면 그 주제에 집중해서 논리적으로 설명을 하는 것이 아니라 시작은 제대로 하다가 이것저것 두서없이 말하고보니 나중에는 얘기가 삼천포로 빠지더라라는 방식.
최불암과 동갑이다. 둘 다 1940년생. 또한 이소룡과 척 노리스 역시 이 두 사람과 같은 나이인 1940년생이다.
데뷔와 악단 사회자 시절
1940년 10월 24일 강원도 고성군에서 태어나 춘천고등학교를 졸업하였고 경원대학교(現 가천대학교) 경영대학원을 졸업하였다.
춘천고 재학 시절 축구선수로 제법 활약을 보였고, 친구 박종환과 함께 경희대학교에 진학할 예정이었지만, 고향에서 보내 준 대학 등록금을 섯다판에서 털리는 사고를 쳤고, 결국 이주일은 도피처로 군 입대를 선택했다.
1960년 현재의 국방홍보원 홍보지원대에 해당하는 문선대에 뽑히면서 처음 코미디를 시작한 이주일은, 1965년부터는 샛별악극단 사회자로 연예계에도 진출한다. 하지만 그는 1971년 베트남 파병 병사들을 위한 위문공연 길에 지원하여 조금 이름을 알린 것을 제외하면 10여년 동안 무명의 코미디언의 설움을 겪으면서 상당히 가난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1977년 11월 이리역 폭발사고 발생 당시, 이리 시내의 극장에서 가수 하춘화의 리사이틀 MC를 맡고 있던 이주일은 폭발로 인하여 무너진 극장 천장에서 떨어진 벽돌에 맞고 머리가 피범벅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하춘화에게 "내 머리를 디디고 내려오라!"고 외치며 그녀를 구하여 업고서는 병원까지 전력질주 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하춘화는 다행히 찰과상 정도로 그쳤지만 정작 이주일 본인은 후두부가 함몰되는 중상을 입고 수개월 동안 병원신세를 져야 했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하춘화는 항상 자신이 공연하는 쇼의 사회자는 "이주일 아니면 안된다"고 공연 관계자들에게 강력히 공언했고, 이주일은 하춘화 공연의 전속 사회자로 얼굴을 알리게 되었다. 이 때문에 이주일은 "길거리에 나앉을 수 밖에 없었던 내가 하춘화 덕분에 우리집을 샀다"면서 한참 여동생 뻘의 연하인 하춘화를 자신의 은인으로 존경했다고 한다.
TV 진출과 전성기
1979년 이주일은 하춘화의 주선으로 MBC의 간판 코미디 프로그램이던 웃으면 복이와요에 출연하면서 처음 TV 무대에 데뷔하게 되었다.참고로 당시 방송에 출연하던 코미디언 중 유일하게 서영춘 만이 방송국 대기실에서 이주일을 처음 보고 속으로 '저 친구 TV에 나오면 반드시 뜬다!!' 라면서 이주일의 재능을 간파했다고 한다. 그러나 기존에 출연 중이던 선배 코미디언들의 견제와 "뭐 저렇게 못생긴 놈을 내보내느냐?"는 시청자들의 불같은 항의로 인하여 이주일은 웃으면 복이와요 에서 단 1회 출연만에 하차당했다.
그러나 이주일은 한국 코미디계의 대부이던 김경태 PD에게 발탁되어 TBC의 코미디 프로그램 토요일이다 전원출발에 캐스팅 되었다. 처음에 이주일이 맡은 역할은 당시 청춘스타로 높은 인기를 구가하고 있던 가수 윤수일이 타잔 흉내를 내면서 줄을 타고 공개홀 한가운데 만든 연못을 가로지르는 콩트에서 무대 뒷편에 서있는 단역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너무 긴장했던 이주일은 조연출의 큐 사인을 무대로 올라오라는 지시로 착각하여 바로 무대 중앙으로 올라가 버렸고, 결국 줄을 타고 내려오던 윤수일과 부딪쳐서 연못 속에 빠져 버렸다. 한술 더 떠 당황한 이주일은 연못에 빠진 상태에서 그대로 얼굴을 들 멍한 표정으로 카메라와 눈을 마주쳤는데(그것도 생방송에서 말이다), 그 모습은 가히 물에 빠진 ET 꼴이었고 이 날 방청객과 시청자들은 "저놈 뭐하는 거냐?"면서 왁자지껄 웃음을 터뜨렸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보면 당연히 두 번 다시 TV 무대에 얼씬도 못할 수준의 초대형 방송사고였지만, 이 때 빵 터진 시청자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에 힘입어 재차 출연하게 된다. 이 때 맡은 배역은 의사였는데, 환자 역할을 맡은 코미디언 최용순의 눈을 까뒤집어 보고는 운명하셨습니다"라고 한마디 할 뿐인 단역이었다. 그런데 너무 긴장한 나머지 병실에 뛰어들어 오자마자 "운명하셨습니다!" 를 외쳤고, PD가 카메라 뒤에서 '환자 눈이라도 까뒤집고 대사를 쳐야 할 거 아니냐?' 라는 신호로 눈을 까뒤집는 시늉을 하자 이 동작을 본 이주일은 그만 자기 눈을 까뒤집어 보이며 '운명하셨습니다'를 읊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생방송에서... 이 애드립 아닌 애드립에 방청객들은 물론 출연자, 방송 스탭 모두 그 자리에서 배를 잡고 뒹굴어야 했다.
2번의 방송 출연에서 이처럼 엄청난 임팩트를 선사한 코미디언의 이름이 궁금해진 시청자들은 TBC에다 문의 전화를 계속해서 걸기 시작했고 이와 같은 반응을 본, 아직 정주일이라는 본명으로 활동하고 있던 그는 딱 2주일만에 떴다는 뜻에서 이주일로 예명을 정하게 된다.
지금도 전설로 회자되는 이 프로 '토요일이다 전원 출발'에는 당대 최고의 코미디언 서영춘을 비롯 기라성 같은 유명 코미디언들이 출연하고 있었는데, 이후 대부분의 코너가 이주일을 전면에 내세우는 코너로 바뀌게 된다. "뭔가 보여드리겠습니다.", "얼굴이 못생겨서~ 죄송합니다~", "여러분! 제가 얼핏 보면 못생겼지만 자세히 뜯어보시면... 더 못생겼습니다", "따지냐?"라는 대표적인 유행어도 이 때 나왔다.
1980년에는 이상해와 콤비를 결성하여 판토마임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고, 수지 큐(Susie Q) 음악에 맞춰 엉덩이를 씰룩거리는 독특한 춤은 이주일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다. 이 춤의 인기가 어느정도였는지는 당시 한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의 증언에 따르면 "애국조회 마치고 '교실로 갓!'이라는 구령이 나오면 천 명에 가까운 전교생이 동시에 수지 큐 춤을 추면서 교실로 들어갔다니까"라고 티비에서 방영한 이주일 추모 다큐멘터리에서 언급되었다. 이후로도 "따지냐~?", "콩나물 팍팍 무쳤냐?"등의 유행어를 선보이면서 최정상의 인기를 구가하게 된다.
다만, 이것 때문에 일부 교사들과 특히 학부모들은 굉장히 싫어했다. 이유가 "멀쩡한 애들 다 버려놓는다" 였으니. 그래서 이주일은 어이없어하면서 "내 프로를 보고 모자라게 된 아이들은 나에게로 보내달라, 내가 일주일안에 정상으로 돌려놓겠다."라고 했을 정도였다.
여담으로, 심형래도 학부모들에게 이런 비슷한 항의를 받은 적이 있었다고 하는데, 심형래 본인은 "그 애가 중학생이 되도록 그러고 있으면 병원으로 데리고 가야지?"라고 한 소리 하기도 했다. 그런데 사실 중견 코미디언 황기순 역시 바보 역할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럼에도 황기순이 바보 역할 한다고 뭐라하는 사람은 없었다 다른 일로 주목받기는 했지만.
그리고, 이 폭발적인 인기에 힘입어서 이주일은 농심그룹 라면 CF에 많이 출연하였다. 라면 CF를 찍은 이유는 이주일 본인이 라면을 좋아해서였다고 한다.
방송출연 중단
하지만 이러한 전성기 시절에도 너무 못생겼고, 저질이란 시청자들의 어처구니 없는 항의를 계속해서 받았고 결국 해당 사유로 1980년 연예인 사회정화운동에 따라 8월 29일에 열린 5개 TV/라디오 방송사 심의실장 회의에서 9월 1일부로 이기동, 배삼룡, 태진아, 나훈아, 심수봉 등 24명의 연예인들과 함께 방송금지 처분을 받았고 1981년 신정에 출연금지 해제 이후 KBS의 <100분 쇼> 등을 통해 방송에 복귀했다. 이주일이 방송에서 퇴출되기 직전에는 영화에도 출연했는데, 그 영화에서는 바지사장으로 사기당하는 시골 총각으로 등장한다. 제목은 리빠똥 사장.
복귀 이후에도 극장식당 무랑루즈, 초원의 집 등의 밤무대 에서 활동했는데, 지금보다 밤무대가 훨씬 비중도 크고 돈도 많이 벌던 시절이라 그의 코미디계 원톱 지존 자리는 흔들리지 않았다. 빈말이 아니라 진짜로 밤무대의 제왕이었다. 1980년대 초 전속금 1억, 연예인 납세 1, 2위를 다툴 정도. 쉽게 말하자면 80년대를 풍미한 트로이카 유지인, 정윤희, 장미희급이나 가왕 조용필 정도는 되어야 이주일이 돈 버는 정도로 엇비슷하게 벌었다. 이 기간동안 이주일을 TV에서 볼 수 있는 건 청보식품을 비롯한 식품 회사의 광고들 뿐이다. 이 때의 유행한 유행어가 "일단 한번 드셔 보시래니깐요~!"
당시 밤무대에서 활동하던 이주일의 개그를 직접 목격한 어르신들의 증언에 따르면 "이주일의 진짜 지존 개그는 방송에서 보여주는 그런 건전개그가 아니라 밤무대에서만 볼 수 있는 EDPS."
이주일이 방송출연을 금지 당했던 것은 아마 전두환 때문이라는 것이 정설로 여겨진다. 그 당시 이주일 외에도 대머리였던 연예인들이 방송에 거의 나오질 못했다. 덧붙이자면 그 사람을 닮은 배우 박용식은 그 사람을 닮았다는 어처구니 없는 이유로 한동안 방송을 쉬어야만 했고, 방앗간을 운영하며 참기름을 팔아 근근히 생활하였다고 한다. 아이러니한 건 이후 MBC의 정치드라마 제4공화국에서 그 사람의 연기를 맡게 된다.
일단 명목상 대머리라서 잘린 건 아니지만... 전두환 관련 조크 가운데 이주일에 얽힌 것이 많긴 하다. 대표적인 것으로 전두환이 미국 순방을 갔는데, 마중 나온 교포 가운데 한 어르신께서 반갑게 악수를 하며 "어이쿠! 이주일씨, 먼길 잘 오셨습니다!" 했다던가?
일부 증언에 의하면 그 사람 정권 초기에 사회 분위기를 휘어잡는답시고 시범 케이스로 언론탄압을 하던 와중에 이주일에게 '저질 코미디언' 딱지를 붙여 퇴출시켰는데, 정작 전두환 본인은 이주일이 자취를 감추자 "아니, 그 웃긴 양반 요즘은 왜 안 나와?"라면서 의아해했다고 한다. 이후 춘천고 동기생인 박종환 감독을 통해 전두환과 친분을 쌓게 된다. 이유는 그 사람이 축덕이었기 때문이다.
전두환과의 관계 그리고 축구
자서전인 "인생은 코미디가 아닙니다"에서 자신이 전두환을 풍자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정작 자신은 전두환을 경애하며 그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말하는 부분이 있다. 그 이유는 전두환과 이주일이 축구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주일은 춘천고 시절 축구선수로 뛰었으며, 춘천고 동창생이 바로 1983년 멕시코 U-20 월드컵 대회에서 4강 신화를 이룬 박종환 감독이다.
이주일이 무명시절에 고생을 할 때, 박종환이 가끔씩 도와줬다고 하는데 이주일의 부인이 출산 후 몸조리는커녕 먹을 게 없어서 고생하고 있을 때 박종환이 미역과 쌀을 사왔다고 한다. 이 때문에 이주일은 항상 박종환을 고맙게 생각했고, 유명 코미디언이 된 이후에는 박종환 감독에게 승용차를 선물하기도 했다고 토크쇼에서도 여러번 언급하였다. 본인도 고인이 된 이주일을 언급하면서 "그 친구만 생각하면 눈물만 난다"며 각별한 우정을 과시했다.
박종환 감독과 인연으로 전두환과 만났고, 이후로도 줄곧 막역한 사이로 지냈다. 그것 말고도 방송출연 금지 크리를 맞기는 했지만 그 때문에 당시로서는 방송출연보다 벌이가 좋은 밤무대에 전념할 수 있었고, 생계에 지장은커녕 방송에서 얻은 지명도와 방송에서는 볼 수 없다는 희소성이 상승작용을 일으켜 경제적으로는 윤택해졌기 때문에 전두환의 조치에 불만을 크게 가질 이유가 없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실제로 예능 프로에서 최병서가 이주일과 함께 술을 마시다 뜬금없이 '전두환한테 억울함을 호소해야겠다.'며 오밤에 집에 찾아갔더니 흔쾌히 맞이하며 술상도 상다리가 부러지게 차려왔다고 하는 일화를 밝히기도 한 걸 보면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는 듯 하다.
그밖에 잔디구장 건립기금으로 1천만원을 내기도 했고, 연예인 축구단인 무궁화 축구단 단장을 지낸 바 있으며, 상기했듯, 2002년 월드컵 당시 투병 중인 몸을 이끌고 직접 경기를 관람하기도 하였다.
정주영과의 관계
그는 현대그룹 명예회장인 왕회장으로 불렸던 아산 정주영과도 친분이 있었다. 같은 강원도 영동지방 출신이었던데다가 1915년생인 왕회장보다 나이가 30살이나 어렸지만 의형제로 보일 정도로 친분을 가졌으며 이같은 인연으로 정치에 발을 들여놓는 계기가 되었다. 이주일에게 정치 한 번 해보는게 어떴냐고 제안하던 사람 역시 왕회장이었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것은 1984년 미국 LA에서 이루어졌는데, 당시 LA에서 올림픽이 열리고 있던 때였고 다음 개최지가 서울이었기 때문에 왕회장은 1988년 서울올림픽 홍보를 위해서 LA에 방문하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런 고로 그는 왕회장이 창당한 통일국민당에 입당하여 당원으로 활동하고 1992년 14대 대선 때 왕회장의 유세를 지원하고 상대방 후보로 있던 김영삼, 김대중을 강도높게 비난하기도 하였다. 그 당시 왕회장은 특히 김영삼을 강도높게 비난하였던 편으로 이주일이 개인적으로 김영삼을 비난한 것이 아니라 왕회장의 뜻이 그렇고 왕회장 지원유세로 나왔던 입장에서 나온 것이라 개인이 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구봉서와의 관계
일진 - 빵셔틀
대략 이걸로 설명이 가능하다. 물론 구봉서가 진짜로 일진 날깡패였다는 건 아니고 그 정도로 이주일이 구봉서에게 쩔쩔맸다. 그것도 평생동안!
구봉서가 독실한 개신교 신자에 인격이 온화해서 이주일이 구봉서 때문에 심한 고생을 하지 않은 것은 천만다행이지만 그래도 같은 코미디언이라는 직업에 나이는 14살 차이, 데뷔는 4년 차이라는 만만치 않은 선배인지라 절대로 가벼울 수가 없는 상대였다. 코미디언의 군기가 얼마나 악랄한지 생각해보면 눈조차 함부로 마주칠 수가 없었다.
사실, TV방송 데뷔 차이일뿐이었고 구봉서, 서영춘, 배삼룡을 비롯한 1세대 희극인들은 TV 방송이 존재하기 이전의 40~50년대 부터 만담꾼, 희극단을 전전하면서 이미 TV방송 출연 이전부터 희극인으로서 경력이 수십년 이상 쌓였던 베테랑이였다. 그러니까 60년대 중후반에 데뷔하고 70년대 후반에서야 유명해지기 시작한 이주일이 40~50년대부터 활약한 한 세대 전의 인물이었던 구봉서에게 쩔쩔맨것도 당연. 쉽게 비유하면 이경규 - 박명수의 관계와 흡사하다고 볼 수 있다.
그래도 구봉서는 이주일에게 선배로서는 그나마 잘 대우해준 편이다. 주병진이 이경규에게 대한 태도보다 강도가 약했던 것은 확실하고 김형곤의 경우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하지만, 구봉서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으니 정말로 가는 데에는 순서가 없다는 말이 딱 맞다.
이덕화와의 관계
생전에 배우 이덕화와 사적으로 친한 사이로 알려졌고 1952년생인 이덕화와는 12살의 연하였지만 서로 의형제처럼 지낸 것으로 알려졌다. 1996년 이덕화가 당시 신한국당 광명시 갑 국회의원으로 출마하였을 때 국회의원 시절을 생각하며 이덕화에게 정치 하지마라, 내가 그 판에 몸소 경험해봐서 아는데 그거 사람이 할 짓이 아니다. 근데 왜 너는 그 판에 가려고 출마를 하느냐, 차라리 출마하지 말아라라며 충고를 주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덕화는 이런 이주일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신한국당 국회의원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결국 낙선하게 되면서 이주일과 마찬가지로 배우로 방송계에 돌아오게 되었다.
1997년에는 북한 김정일의 전처 성혜림의 아들인 이한영이 피살되자 북한의 위협에 두려움을 느껴서 한때 이덕화의 자택에 은신한 적도 있다고 한다.
금호그룹 박삼구 회장과의 관계
아산 정주영 이외에도 경제인으로 금호그룹(현재의 금호아시아나그룹)의 박삼구 회장과도 면식이 있는 사이로 알려졌다. 이는 자서전 인생은 코미디가 아닙니다에 고인이 저술하면서 밝혀졌다.
국회의원 출마
1992년 14대 국회의원으로 진출하기도 했다. 고(故) 정주영 회장이 대통령이 되기 위해 통일국민당을 결성하였을 때 처음에는 참가할 듯하다가 마음이 심란해져서 홍콩을 다녀온 이후 국회의원에 출마하지 않겠다는 폭탄선언을 했다. 그러자 정주영 회장은 노구를 이끌고 그 날 이주일이 게스트로 출연한 SBS 본사 앞에 가서 10시간을 기다렸다. 이주일이 기자들을 피하기 위해 방송이 끝나자마자 홀연히 뒷문으로 빠져나간 뒤인지라 정주영 회장은 헛걸음한 셈이 되었지만, 국민들에게 '정주영은 아직 늙지 않았다'는 믿음을 퍼뜨린 사건이었다. 결국 이주일은 왕회장의 노력을 차마 못 본 체 할 수 없는지라 출마를 결정하게 되었고 당당히 경기도 구리시 지역구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그러나 다들 아시다시피 국민당은 '당원이 1000만인데 득표수가 400만에 못 미치는' 기현상과 함께 푸시식 가라앉았고, 도중에 민주자유당으로 당적을 옮긴 이주일은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는 출마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며 정치판과의 인연을 끊었다. 이 당시 연예계에 복귀하며 뱉은, "여기에는 나보다 더 코미디를 잘하는 사람들이 많다. 코미디 공부 많이 하고 떠난다"는 말은 전설로 남았다.
이주일은 후일 정치인 시기를 회고하면서 역시 여당이 좋더라라는 말을 남겼다. 정주영 정계은퇴 후 본인도 국민당을 탈당하고 정치에 의욕을 잃어가면서 지역구인 구리에 뭐 하나 제대로 해준 게 없었는데 마침 안정의석 확보에 나서던 집권여당 민주자유당이 입당을 제의하자 (어차피 정치에 뜻을 잃어 다음 선거 불출마할거니 지르고 보잔 식으로) 구리에 실내체육관 하나랑 구리여고에 강당 좀 지어주소라고 조건을 내걸었더니 바로 조건을 콜했고, 예산이 반영되어 체육관과 강당이 지어졌다고. 또한, 이주일은 국회의원 세비도 반납하는 등 차별화된 행보를 보이기도 했다. 시대를 앞선 세비 반납 때문에 동료 의원들로부터 왕따를 당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1996년, SBS에서 방영을 시작한 이주일의 투나잇 쇼로 다시 연예인으로 돌아온 이주일은 복귀 뒤에는 꽤 수위 높고 풍자성 강한 개그를 선보였다. 너무나 강렬해서 방송위원회에서 경고를 수 차례 받았을 정도.
여담으로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기 4년 전인 1988년 4월 MBC의 한 코미디 프로에 나와서 "이제 13대 국회가 시작됐습니다. 13대 국회도 횡설수설을 즐겨하는 국회가 된다면 이 이주일도 14대 총선에 자신있게 출마하겠다고 횡설수설하면서..."라는 개그를 시전한 바 있다. 그리고 4년 뒤인 1992년 스스로 뱉은 개그가 현실이 됐다.
흡연, 그리고 사망
"내가 막상 이렇게 되니까 그 때 비로소 믿는거에요. 이 얼마나 늦었습니까? 그래서 다른 사람보고 빨리, 지금 빨리, 하루빨리 내일 모레 미루지 말고 빨리 끊으라는 얘기를 하는 겁니다."
- 2001년 폐암 말기 판정을 받은 후 암 치료를 받으며 경기 고양 일산 국립암센터에 입원했을 당시.
"담배를 끊어버리지, 그러면 나같이 고통을 안 당할텐데. 이 얘기를 국민들이 알아듣고 동참해 주었으면 좋겠어요."
- 폐암 말기 투병중 MBC와의 인터뷰에서
"한때는 나도 담배를 자주 피웠던 골초였다. 지금 생각만해도 내가 저 때는 왜 저랬었는지 후회가 사무친다."
- 한국일보사 刊 저서 인생은 코미디가 아닙니다 中에서
"담배 맛있습니까? 그거 독약입니다. 저도 하루에 두 갑씩 피웠습니다. 하… 이젠 정말 후회됩니다. 1년전에만 끊었어도....(기침)"
"흡연은 가정을 파괴합니다. 국민 여러분. 담배, 끊어야 합니다."
원래부터 애연가였지만, 1991년 11월 7대독자였던 외아들인 정창원 군이 갑자기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면서 더더욱 담배가 늘었다. (그의 장례식에는 사위가 상주로 나와야 했다.) 그러나 장례식이 끝나고 3일 후 SBS 개국특집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여러분 죄송합니다. 여러분께 깊은 사과의 말씀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그동안 (민주자유당의) 김영삼 씨와 박철언 씨의 관계 개선을 해내지 못해 정말 죄송합니다"라는 말로 태연하게 청중을 웃긴 일화는 유명하다.
그러다 2000년대 모 예능출연 이후 폐암 말기 판정을 받아 투병생활 인해서 방송에서 자취를 감추다가 2002년 1월부터 금연 광고를 하기 시작하여 "담배 맛있습니까? 그거 독약입니다. 저도 하루에 두갑씩 피웠습니다"라고 호소하며 수많은 사람들이 금연하도록 권장하였으며, 살아있을 때 2002년 월드컵에서 한국팀이 활약하는 걸 꼭 보고 싶다며 몇 달만 더 살고 싶다고 염원했으며 적어도 2002 한일월드컵은 휠체어를 타고 관람하여 그 바람은 이룰 수 있었다.
그리고 2002년 8월 27일 결국 폐암으로 생을 마감했다.
그가 사망하고 SBS에선 이주일 추모 다큐멘터리를 방영했는데 내레이션이 성우 엄주환이었다....알다시피 이로부터 3년도 안가 별세했기에 당시 녹화하거나 어찌하여 남은 자료를 보면 뭔가......
이주일의 사망 원인은 흡연이 아니다?
병석에 누워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방송국에서 찾아가 인터뷰를 했고, 당시 이주일은 내 병은 담배와 관련이 없다는 말을 했으며, 사후 이주일의 사인이 "선암"(폐에서 발생하는 암의 일종)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KT&G 관계자 및 골수 애연가들은 "죽기 전에 좋은 일 하겠다는 뜻은 알겠지만, 안 그래도 무시당하는 우리까지 물고 가느냐"며 고인에 대해 분통을 터뜨리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의학적 지식이 잘못 알려진 것인데, 폐암은 주로 네 종류(소세포암, 편평세포암, 큰세포암, 선암)가 있고, 이 중 선암은 80년대 말까지 다른 폐암에 비해 여성/아동에서 많이 발생해서 흡연과 무관하지 않느냐는 말이 의학적인 통설이었다.
선암은 국내에서 가장 많이 발생하는 폐암이었기 때문에, '한국인은 흡연을 해도 폐암에 잘 안 걸린다'라는 미신까지 흡연자들 사이에서 만들어진 상황이었다. 그러나 90년대 초 국민 보건 사업을 위한 암발생 실태 조사에서 국내의 선암 역시 흡연과 아주 밀접한 연관성을 가진다는 것이 밝혀졌고, 동시에 미국와 유럽에서도 선암과 흡연의 발생 메커니즘에 대한 연구가 나오면서 선암은 흡연과 무관하다는 것은 완전히 헛소리가 되었다. 즉 고 이주일씨와 선암을 둘러싼 논란은 일단락 되었다. 참고로 선암은 폐암의 35~40%정도를 차지하며 비흡연자나 여성에게 많이 나타난다. 가장 흡연과 관련성이 적은 암이긴 하지만 흡연과 무관하지는 않다. 다만 비흡연자가 폐암에 걸렸을 때는 높은 확률로 선암이다.
기타
90년대까지만 해도 코미디언들의 세대 구분법은 이주일과 코미디를 해 본 사람과 안 해 본 사람이었다고 한다. 참고로 2010년대 현재, 희극계에서 고참급이라고 불리는 이들 중, 이주일과 같이 코미디를 해 본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
이주일이 엄청 고참 코미디언임에도 불구하고 정말 평생을 걸쳐 어려워하고 무서워한 선배가 있다. 바로 구봉서다. 이주일은 환갑이 되도록 구봉서를 보고 벌벌 떨었다. 개그계의 선후배란 이런 거다.
이주일은 이덕화, 조용필, 최병서와는 분야와 나이를 모두 초월한 절친이었다. 특히 조용필과는 둘도 없는 술친구였다고. 두 사람 다 주량이 가공할 만한지라 주사도 끝내줬다는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다.
이주일 : "용필아, 네가 스타냐?"
조용필 : "그러는 형님도 스탑니까?"
이주일 : "이 짜식이~."
조용필 : "형이란게 말야~."
이외에도 미국에서 후배들과 순회공연이 끝나고 기념으로 사진을 찍으려고 하던 중 사진기가 없어서 근처 상점에 들렸을때 이주일이 최병서에게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야 카메라가 영어로 뭐냐?" 이덕화는 이주일이 죽기 직전에 시한부 인생인 이주일에게 가발을 맞춰주기까지 했다.
재미동포들을 위한 위문공연때 망중한으로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관람하던 중, 자버린 일화가 있다. 그냥 조용히 잤으면 됐으련만 코골이까지 동반되어 난처한 상황이 되자 나름대로 기지를 발휘한다고 한게 밖으로 나가서 극장 관람석 입구문을 열고는 '"야, 재팬! 재팬 다 나와라!!"라고 외치고는 문닫고 나갔다고.
정치인 이회창과 목소리가 굉장히 흡사하다.
걷는 것을 굉장히 싫어했다고 한다. 심지어 거리가 50m를 넘어가는 곳이라면 자동차를 이용했다고 한다.
방송에 안 나올 시절에도 라면 광고는 꼭 출연했을 정도로 엄청난 라면 광이었다고 한다. 최전성기 때 농심그룹의 전속모델로 활동했으며, 1985년에 청보식품이 런칭될 때 청보식품에서 전속모델로 모셔가기도 했다.
자유북한방송에서 내놓은 만화 김정은에 의하면 남한방송을 즐겨보던 김정남이어렸을 때 이주일을 데려오라고 땡깡을 부려 측근들이 충공깽에 빠진 적이 있다고 한다. "이주일은 남조선에 있으니 못 데려 온다"고 아무리 설득해도 "남조선이든 달나라든 그건 내 알바 아니니 데려오라!"고 들어먹질 않아서 김일성에게 보고하니 "알아서 해라"라는 명령이 내려왔다고. 결국 양강도에서 이주일하고 가장 닮은 농민을 찾아내서 분장/연습시켜 제법 비슷하게 따라할 정도가 되자 김정남 앞에 데려가 공연했다고 한다. 김정남은 20분 동안 말없이 공연을 보더니 "연극 하느라 수고 많았다"라고 가짜 이주일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도 칭찬하고 그 농민에게 술과 양복을 내렸다 카더라. 이 증언은 황장엽의 자서전에도 나오며 김정남의 이종사촌인 탈북자 이한영씨의 증언과도 일치한다. 다만 결말은 다른데 칭찬한 위의 서술관 달리 이한영은 김정남이 가짜라면서 마구 땡깡을 부렸다고 한다.
1991년 7대독자 아들인 정창원 씨를 잃었다. 선보러 가는 길에 그만 교통사고로 변을 당하고 만 것이다. 그것 때문인지 훗날 수양아들을 두 명 두었다고 한다. 더구나 자신의 일생을 극화로 한 '이주일의 울고 웃긴 30년'을 세종문화회관에서 공연했을 때 제작진들이 이 비극도 같이 넣는 패륜(?)을 저질렀는데 그만 이주일의 부인이 그 공연에서 보고 만 것. 그래서 부인에게 엄청나게 항의를 받았고 부인은 집에서 앓아누웠다. 아울러 여담으로 공연 마지막에 그가 무대에서 관객들을 향해 "나는 울고 있는데 여러분은 왜 웃으십니까?"라고 외치자 그 당시 많은 관객들이 울면서 돌아갔다고 한다.
성우 박일이 이 분의 성대모사를 무척 잘한다. 미중년 전문 성우이기는 하지만, 의외로 정말 싱크로가 좋다. 박일은 격동 50년, 배한성, 배칠수의 고전열전 삼국지에서 방통 역할로 이주일의 성대모사를 제대로 선보였다. 또 잘 알려져있지는 않지만 중견 개그맨 김종국 역시 이주일 성대모사를 잘하기로 유명하다. 다만 개그맨 이봉원은 억지과장이 아닌 이주일 생전의 디테일한 모습 그대로를 표현한다는 점 때문에 이주일 본인에게도 '공인'받은 이주일 성대모사 1인자이다.
못생긴 외모로 괄시아닌 괄시를 받던 이주일에게도 외모로 이긴 상대가 있었으니 바로 가수 조영남이었다. 한번은 그가 야간업소(당시엔 가족들이 같이 외식하면서 유명 연예인들의 공연을 볼 수 있는 극장식당이 성행했다.)에 출연했는데 조영남도 같이 출연했다. 그런데 관객들 중 어린이 한명이 조영남의 얼굴을 보곤 울음을 터뜨렸는데 이유인즉 험상궂은 조영남의 얼굴모습 때문이었던 것. 그걸보고 이주일이 날린 촌철살인 코멘트,
"그래도 전 애가 울어버리는 참사는 발생하지 않습니다. 제 얼굴이 아무리 못생겼다지만 조영남이 보단 잘생겼습니다. 절 너무 괄시하지 마십쇼. 전 정말 조영남이 하나 바라보고 삽니다."
흥국화재 보험 CF 주인공으로 등장?
대역 목소리 : 코미디언 이봉원
2008년 TV 광고에 사후 6년만에 생전 모습으로 흥국화재 보험 CF에 등장한 적이 있었다. 흑백 분위기 속에 생전 전성기적의 모습으로 나오게 되었으며 목소리가 생전 목소리와 흡사해서 일부에서는 이주일씨 죽었는데 어떻게 CF에 등장했냐는 의문이 나돌 정도였다.
참고로 이주일 씨의 목소리는 후배 코미디언 이봉원씨가 대역으로 이주일 성대모사로 목소리를 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고인의 생전 목소리와 흡사해서 마치 고인이 부활한것처럼 보였다는 반응이 많았다.
흥국화재측에서는 이주일씨 유족과의 동의를 얻어 과거 코미디 황제로 불리웠던 고인에 대한 추억과 향수를 부르기 위해서 광고를 제작하게 되었다고 밝혔으며 광고출연료는 불우이웃돕기에 쓰인다고 하였다.
비슷한 사례로 2002년 고려제약 하벤 플러스 CF에도 1987년에 작고한 서영춘과 자녀 두 분이 출연한 바 있었는데, 사실은 서영춘의 공연 영상에 두 자녀분의 춤추는 모습을 합성한 것이다. 실제로 해당 CF를 제작한 애드씨씨는 서영춘 공연 영상을 찾기 위해 국정홍보처 산하 국립영상간행물제작소를 찾아갔다.
사건사고
'코미디 황제' 故 이주일 묘소가 사라졌다… “유골 파내지고 비석 버려져” 라는 기사의 내용을 따르면 이주일의 부인이 유골을 정리해 갔고 비석은 버려진 상태라고 한다. 다만 그 이유는 다른데 이주일씨의 여동생은 관리비가 체납되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된 것이라고 하는반면 이주일의 장녀는 관리비가 체납된일은 없었다고 증언해 진의를 알 수가 없는 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