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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래 박정희 모가지 따러 왔수다" 김신조 1.21 사태를 알아보자



대한뉴스 <서울로 침투한 무장간첩 사살 및 북한의 만행>

1968년 1월 21일 북한 민족보위성 정찰국 소속 공작원(124부대) 31명이 청와대를 습격하여 박정희대통령을 암살하기 위하여 서울 세검정 고개까지 침투하였던 사건.

총 침투한 31명중 사살 29명, 미확인 1명, 투항 1명(김신조 소위)의 전과를 올렸다. 유일한 생존자인 김신조의 이름을 따서 이 사건을 일명 '김신조 사건'이라고도 한다.

김신조는 이튿날의 기자회견에서 침투 목적을 묻는 기자에게 "박정희 모가지 따러 왔수다!"라고 밝혀 온 국민을 경악하게 만들기도 했다.


원래 북한에서 최초로 세운 작전은 세자리 숫자의 병력을 침투시켜서 본대는 청와대를 기습해서 박정희를 암살하고 나머지는 각 조별로 미 대사관 공격 및 요인 암살, 국방부 공격 및 요인암살, 교도소 공격후 죄수 석방 등 서울 시내에 총체적인 대혼란을 유도하고 석방시킨 죄수와 공격조가 동반 월북 후에 삐라를 뿌려서 남한내 반정부 세력의 의거로 꾸민다는 대규모 계획이었다고 한다. 한마디로 한국판 테트 대공세를 노린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러가지 현실적인 이유로 작전을 축소해서 30여명을 침투시켜서 청와대를 습격하는 것으로 최종결정이 난것이다. 참고로 김신조는 원래 교도소 공격조였다고 한다.


김신조 루트

1월 13일 북한군 정찰국장에게서 청와대 습격에 관한 구체적인 지시를 받은 124 부대원 31명은 1월 16일 밤 10시 황해북도 연산군의 제6기지를 차량으로 출발한다. 18일 휴전선을 돌파했다. 19일 꽁꽁 얼어붙어 있던 임진강을 걸어서 횡단, 경기도 고양시 삼봉산에서 하룻밤을 보낸다. 그 후 20일 앵무봉을 통과하여 비봉-승가사로 이어지는 산악길을 타고 21일 밤에는 세검정파출소 관할 자하문초소까지 이른다.

이때 북한의 암호지령이 내려왔으나 해독하지 못하였다. 당시 침투한 병력 중 암호를 전담하는 인원이 없었다고 한다.

미 육군 2사단이 담당하고 있었던 서부 철책선 근무는 허점이 너무나 많았으며, 특히 미군과 한국군의 담당지역의 경계선을 따라 침투하여 더욱 손쉽게 돌파 가능했다고 한다.


124 부대원들은 경기도 파주군 법원리 초리골의 야산에서 우연히 나무꾼 우씨 삼형제와 마주쳤는데, 눈 덮인 산에서 시체를 처리하는 것이 번거롭다는 것과 프롤레타리아 계급인데 설마 신고 하겠느냐는 이유로 투표를 통해 그들을 살려주기로 하고 "신고하면 가족들을 모두 몰살시키겠다"라 덧붙이며 풀어주었다. 그리고 나무꾼 형제는 곧바로 인근 파출소로 달려가 신고... 일설에 따르면 김신조 일당은 우씨 삼형제를 "동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걸 들은 나무꾼 형제들은 저것들 공비구만 하면서 기겁했다고.

이런 치명적인 실책을 범해서 나무꾼들이 경찰에 신고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하문 초소에 도달하기 전까지 아무 검문도 받지 않았다. 그 이유는 그 당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방첩대 마크 때문이였다. 이들이 군복의 방첩대 마크를 내보이면서 마법의 단어 방첩대만 언급하면 경찰이고 군부대고 달려나와서 무조건 열어줬다고 한다.



자하문 초소 전투
자하문초소에 당도한 124 부대원 31명은 드디어 이곳에서 검문을 받게 된다. 부대원들은 이전처럼 "우리는 CIC 소속 대원이다. 특수훈련을 마치고 복귀 중인데 방해하지 말고 비키라"고 다그쳤지만, 대량의 병력 이동을 보고받지 못했던 종로경찰서장 최규식 총경이 지휘하는 경찰 병력이 그들의 진군을 막아섰다. 하지만 때마침 버스 2대가 길을 따라 올라오는 것을 보자 지원 병력으로 오인한 124 부대원들은 경찰 병력에게 총기를 난사하고 버스에 수류탄을 던진 뒤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났다. 김신조의 회고에 의하면 버스에 국군 병력이 대거 타고 있다고 오인한 것인데 사실은 그냥 시내버스였다.

종로서장 최규식 총경이 현장에서 전사하고 정종수 경장은 중상을 입고 이후 치료 중 사망한다. 그 외에도 많은 경찰이 부상 당했으며, 버스에 던진 수류탄 때문에 민간인인 버스 승객 3명이 사망했다. 무장공비 김춘식 소위는 이 첫 전투에서 경찰에게 생포되었으나 압송 중 숨겨둔 수류탄을 이용해 자폭했다.(사살에 포함)

그 뒤 크고 작은 전투를 통해 29명 사살, 1명 투항(김신조 소위), 미확인 1명이 생포되었다. 우리측의 피해도 상당했는데 최규식 서장을 비롯하여 제1보병사단 15연대장 이익수 대령이 교전 중 피격당해 전사했고, 특히 도주과정에서 무차별 사격으로 민간인 피해가 여러건 발생하기도 했다. 결혼 예정이던 아가씨나 경복중학교(현경복고)의 수위 등 일반인, 심지어는 참관겸 작전 지도차 온 주한미군 병사도 사망할 정도였으니. 총 32명 사망(군 장병 25명, 민간인 7명)에 52명이 부상을 당했다.

사건 직후 고양군과 파주군, 일대에 통금이 떨어졌다.

1월 22일 새벽 2시 25분에 제30사단 92연대의 잠정 1개 중대와 5분 대기조가 인왕산 하단의 세검정 계곡에 있던 독립가옥에서 무장공비를 발견하였다. 상당한 교전을 주고 받다가가 군에서 "나오면 살려준다"라고 회유하니 결국 무장공비 1명이 수류탄을 들고 나왔다. 자폭할 수 도 있는데 그냥 떨어트리고 손들고 나왔다. 그가 바로 김신조 소위였다. 이때문에 국방부 공식기록은 '생포'였고, 세월이 흐른 후 책이나 언론에서는 '투항'이나 '자수'라는 용어도 쓰인다. 정황상 어느쪽으로 우겨도 대충 맞는듯. 김신조는 아예 독립가옥에서 전투가 없었고 자신은 검문을 피하기 위해 무기와 장비를 모두 드보크에 묻어두고, 자폭용 수류탄 한발만 들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니 자수가 맞다고.


04시 15분경 김신조를 인계 받은 방첩대는 그를 보자 마자 '무기 어디에다 숨겨뒀냐?'라고 물었다. 김신조의 직접 안내로 특공대원 25명은, 전날 김신조가 매복했던 비봉 승가사 옆 200미터 지점에서 드보크를 찾아 침투시 일부 장비를 회수 하였다. 이후에도 김신조는 정보 제공등의 방법으로 공비 소탕에 대해 적극적으로 협조하였다.

당시는 공비들이 엄청난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는 인식이 강했는데 이때의 무장 공비 사건으로 김신조의 증언에 의하면 체포후 자신과 함께 산악지대를 누볐던 남한 특공대원들이 북한에서 특수훈련을 받은 자신하고 실력이 똑같았다고 한다. 김신조가 산에서 조낸 뛰었는데도 특공대원들이 옆에 딱 달라 붙어 뛰었다고 한다. 김신조는 체포된 상태라 맨몸으로 뛰고 특공대원들은 총기와 장비를 휴대한 단독군장 차림이였는데도 불구하고.

그후
- 이 사건으로 김신조 루트로 불리던 경기도 양주시부터 서울 우이동까지 북한산 자락을 잇는 우이령길 6.8km가 민간인출입금지구역으로 지정되었다. 이 길은 2010년 2월 27일 41년만에 민간에 개방되었다. 현재는 서울 북악산에 소재하고 있는 김신조 루트가 트레킹 코스로 개발되어 북악하늘길의 제2산책로로 일반에 개방되고 있다. 또한 북한산 우이령길은 북한산둘레길의 한 코스로 개방되어 있는데 완전 개방은 아니다. 이곳을 가려면 인터넷이나 전화를 통해 탐방 하루 전에 예약을 해야 하며, 탐방할 때 본인 확인이 가능한 신분증을 반드시 지참해야 한다. 예약해 놓고 본인확인이 안 돼서 퇴짜 맞을 수 있으니 주의할 것. 또한 하루 입장 가능 인원도 송추 방향에서 5백 명, 우이동에서 5백 명으로 하루 1천 명의 인원 제한을 두고 있으며, 오전 9시부터 오후 2시까지만 입장이 가능하고 오후 4시까지 하산하여야 한다.


- 주민등록번호가 탄생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13자리만 알고있어도 어느정도 그사람 행세가 가능한 매우 중요한 개인정보이지만, 간단한 회원가입시에도 심심찮게 요구하고, 이미 전국민이 한번 이상은 털릴 정도로 유출이 되어 말도많고 탈도많은 제도가 탄생한 만악의 근원이다. 참고로 박정희의 주민등록 뒷번호는 100001이며 육영수는 200002이다 (특권 의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