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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사회.정치.역사.인물

'이태원 살인 사건' 12년만에 검거된 용의자

1997년 4월 3일 밤 10시경 서울특별시 용산구 이태원동 소재 버거킹 남자화장실에서 한국인 조중필(당시 22세)이 별다른 이유도 없이 습격당해 흉기로 9번이나 찔려 살해당했다.


1997년 4월 3일 밤 10시, 홍익대학교 공과대학 재학생 조중필 씨는 화장실을 이용하기 위해 여자친구와 함께 근처 햄버거 가게인 버거킹에 갔다. 여자친구가 주문하는 사이에 화장실에 들어갔고, 곧이어 2명의 한국계 미국인들이 화장실에 들어갔다. 잠시 후 조 씨는 화장실 바닥에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진 채 발견되었으며,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과 119 구급대원들이 도착했지만 이미 9군데를 흉기로 찔린 조 씨는 왼쪽 목 동맥이 절단되어 그 자리에서 과다출혈로 사망했다.



미국 국적자 17세의 아서 존 패터슨(Arthur John Patterson 1979년생)과 18세의 에드워드 건 리(Edward Kun Lee 1979년생)가 용의자로 지목되었다.

사건 다음 날 미합중국 육군범죄수사사령부(CID, Criminal Investigation Command)는 익명의 제보를 받는데, 범인이 아서 패터슨이라는 내용이었다. 제보에 따르면 패터슨은 평소에도 폭력적이고 공격적인 성향을 자주 보였고 늘 흉기를 소지하고 다니며 친구들에게 이를 자랑하고 다녔다고 하였다. 패터슨은 유럽계 미국인 미군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로, 평소 품행이 불량해 부모와 싸움이 잦았으며, 지인들 사이에서는 패터슨이 지역 갱단과 연줄이 있다는 소문이 퍼져 있었다. 16세 때 이미 캘리포니아 소년원에서 16개월 동안 구금된 전력도 있었다. 따라서 미합중국 육군범죄수사사령부는 패터슨을 용의자로 수사방향을 잡았으나, 아들과 잘 어울리던 패터슨의 범행 소식을 접하고, 추궁한 아버지로 인해 에드워드 리가 자신도 이 사건에 연루되었음을 자백하면서 용의자는 2명이 되었다.

그 둘은 서로에게 범죄사실을 미루었다. 당시 이 사건을 조사한 김락권 형사 1팀장과 미군범죄수사대는 아서 패터슨이 온몸이 피투성이라는 점, 손에 미국 갱단의 마크가 있고 살해 방법이 그 갱단의 수법과 비슷하다는 점 등을 들어 패터슨을 용의자로 지목하였으나, 수사를 담당한 박재오 검사는 법의학적인 판단(부검결과)과 그들의 친구인 C의 증언을 근거로 에드워드 리를 용의자로 지목했고, 그를 살인죄로 기소하면서 사건이 꼬이게 된 원인을 제공하게 된다.

당시 검찰(담당 박재오 검사)이 에드워드를 살인범으로 기소하면서 3가지 근거를 제시하였는데, 첫 번째는 키와 체격이였다. 당시 부검의는 상처의 흔적을 봤을때 176cm의 피해자 조중필보다 가해자의 키가 커야 한다는 추정을 하였다. 그리고 아서 패터슨은 피해자인 조중필씨보다 키가 작고 왜소했으나, 에드워드 리는 180cm, 105kg로 피해자보다 훨씬 키도 크고 건장한 체격이였다. 그러나 이 추정에 대해서 표창원 전 경찰대학 교수는 피해자가 다른 공격을 받고 몸을 숙이거나 무릎을 꿇은 상태에서 피해자보다 키가 작은 범인이 피해자를 찔렀을 가능성을 제기하였다. 또한, 박지선 숙명여대 사회심리학과 교수는 법의학적 소견과는 달리 심리학적으로는 신체적으로 왜소한 범인이 반격에 대한 심리적 두려움 때문에 상대를 제압하기 위해 이렇게 과도한 수법으로 범행을 할 가능성이 훨씬 높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두 번째는 거짓말탐지기 조사 결과였다. 에드워드 리는 거짓으로, 패터슨은 진실로 나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조사에도 많은 의문이 제기되었다. 우선 1998년 당시 거짓말탐지기 자체가 신뢰도가 낮아서 30%가 넘는 오차를 보였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조사방법도 엉터리였다는 것이다. 한국말이 서투른 에드워드 리가 조사과정에 통역을 요구했으나, 묵살되고 포승줄에 묶인 상태에서 거짓말탐지기 조사를 받았고, 반면에 패터슨은 한국어가 더 유창했는데도 불구하고, 에드워드 리와는 대조적으로 한국어 통역의 도움을 받을 수 있어 답변할 시간적, 심리적 여유가 있었고, 편안한 상태에서 조사를 받았다는 것이다.

세 번째는 가해자가 범행당시의 충격으로 기억을 잃을 수 있는 해리성 장애를 이유로 에드워드 리를 범인으로 지목했다. 패터슨은 가해자가 칼을 잡은 방법과 찌른 부위와 횟수까지 정확하게 기억하여 증언했고 이는 피해자의 몸에 남은 자창과도 일치했지만, 상대적으로 에드워드 리는 사건 당시의 상황을 제대로 기억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일반적으로 피해자나 목격자의 기억은 경우에 따라 부정확할 수 있으나, 가해자의 기억이 부정확하다는 연구는 어떠한 (범죄심리학)교과서에서도 찾아볼 수 없으며, 검사가 이런 얘기를 어디서 주워듣고 이렇게 사건을 뒤집히게 했는지 이해할 수 없다, 이상하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다행히, 이런 증명된 적 없는 검사의 황당한 주장들은 대법원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도리어 패터슨 증언의 신빙성이 의심된다며 재판 결과를 파기하고 사건을 서울고등법원에 환송한다.





서울지방법원과 서울고등법원에서는 검사의 기소와 근거자료를 인정해 에드워드 리에게 살인죄로 각각 무기징역(1심)과 징역 20년(2심)을 선고하였다.

하지만 대법원에서는 증거불충분으로 사건을 서울고등법원으로 파기환송하였고, 결국 서울고법에서는 새로운 증거를 찾지 못하여 에드워드 리에 대해 무죄를 선고하였다. 살인범일 수도 있지만 증거가 부족하여 유죄를 확정할 수 없다는 이유. 이후 재상고심에서도 대법원은 그에게 무죄 판결을 내렸다. 한편 아서 패터슨은 단순흉기 소지로 기소되어 유죄 판결을 받고 반년 만인 1998년 8월 15일 815 특별사면으로 풀려난다.

에드워드 리가 무죄 판결을 받음에 따라 일사부재리의 원칙에 의해 그를 재기소 할 수 없었던 유족들은 살인죄가 아닌 흉기소지죄로 기소되어 형을 받았던 패터슨을 고소하여 검찰이 패터슨에 대한 수사에 착수하였으나, 검찰이 패터슨에 대한 출국금지 연장을 미룬 사이에 그가 미국으로 도주하는 바람에 사건은 미제로 남게 되었다. 방송에서 파악한 결과 당시 출국금지 등 사건을 담당하는 계장이 단란주점 뇌물수수 등으로 얽혀 담당 검사가 경황이 없어서 연장을 하지 못한 어이없는 실수라는 석연치 않은 이유로 밝혀진다.

유족들은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를 해 서울고등법원에서 피해자 가족들에게 3400만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이 내려졌다. 하지만 이마저 대법원에서 '패터슨이 범죄를 저질렀다는 확정판결도 내려지지 않았고 조사를 아예 안 하겠다는 것도 아니다.'라는 취지로 유가족에게 패소 판결을 내려 손해배상 청구조차 받지 못하게 되었다. 결국은 사실상 진범을 밝힐 기회를 잃었다며 부모님은 1500만 원씩, 누나와 할아버지는 100만 원씩 배상을 받았다.

결국 에드워드 리의 무죄가 확정됐고, 패터슨은 살인으로는 기소조차 되지 않았다. 법적인 의미의 무죄추정원칙과 별도로 패터슨에 대해서는 아직 판단조차 하지 않았다. 검찰은 둘 다 살인죄로 기소하지 않고 리에 대해서만 살인 혐의를 적용하였다. 참고로 영화에서는 동료 검사가 정범, 종범으로 공소를 제기하라고 했지만 박대식 검사가 거절. 이렇게 되면 법원에서도 공범 이론을 적용할 수 없다.



사건이후

당시 초동수사를 지휘했던 김락권 형사가 2013년 사망 당시까지 아더 존 패터슨이 진범이라고 믿은 것과는 달리, 박재오 검사는 현재까지도 에드워드 리가 진범이라고 믿고 있다. 재판부는 경찰수사와 검찰수사에 대해 각각 다음과 같이 표했다. 당시 김락권 형사가 지휘했던 경찰수사에 대해서는 수집된 증거와 여러 목격자의 진술을 바탕으로 내려진 합리적인 의견이었다. 그러나 박재오 검사가 담당하여 진행한 검찰수사에 대해서는 기본적인 원칙조차 없이 수사를 했고, 어떤 합리적인 근거도 없이 패터슨의 진술을 진실로 믿었다.라고 표현해 충격이 일었다. 그러나 더욱 충격적인 사실은 박재오 검사가 취조하는 과정에서 술에 취해있었다는 것이다. 박 검사가 취조나 기소 업무를 처리하면서 술에 취한 상태이고 횡설수설했다는 증언은 조중필 씨의 누나 뿐 아니라 기소당한 피의자 입장이었던 에드워드 리 역시 한 바 있다. 에드워드 리가 음주 상태인 박 검사의 상태를 지적하며 항의하자 욕설을 퍼붓고 서류를 집어던지는 등 격한 반응을 보였다고 아버지에게 말했다고 한다.

당시 사건을 담당한 박재오 검사는 에드워드 리의 무죄 판결에 대한 회의를 느껴 무죄 판결이 난 이후 1년만에 검사를 사직하고 변호사로 활동 중이다.

중요한 사실로, 미국으로 도주한 패터슨은 미국에서도 다양한 범죄를 저질러 여러번 기소되어 재판에 오르내렸다. 반면 리는 오히려 한국에 정착했다.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취재 한 결과 패터슨은 미국 로스앤젤레스 코리아 타운에 거주하는 것으로 확인되었으며 여전히 본인은 결백하며 리가 진범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검찰에서 그렇게 찾아 헤매도 못 찾았다고 한 패터슨을 언론에서는 합법 사설탐정에게 수수료를 지불한 뒤 금방 찾아냈다.

처음 용의자로 지목되었다가 무죄판결을 받은 리는 현재 한국에서 가정을 가진 가장으로 살고 있다고 한다. 2009년 말에 한 인터뷰에 의하면 리는 당시 재판으로 인해 2년 가까이 구금되어 있었고 사건으로 인해 큰 재산상의 피해를 입었으며 살인죄 무죄 판결을 받았음에도 여전히 의심받고 있다는 데에 억울함을 표시했다. 2015년에도 아버지와 함께 인터뷰에 나왔는데, 살면서 잘못을 많이 했지만 최소한 살인만큼은 절대 하지 않았다는 걸 강조했다.

패터슨에 대한 공소시효가 2009년을 기준으로 3년가량 남아 있었다. 만약 미국으로부터 패터슨의 범죄인 인도가 수행된다면 조사하고 재판할 시간은 남아 있을 것으로 보인다. 리는 이미 해당 사건에 대해 무죄 판결이 나 있으므로 일사부재리의 원칙에 의거해 다시 재판이 불가능하다.

한편 이 사건이 거론되기 1년 전인 2008년. 12년 전 미국에서 갱단의 일원으로 독거노인 엔서니 슈레더를 강도 살해한 한인 데이비드 남(남대현)이 체포되어 미국으로 송환되었는데, 아서 패터슨을 다시 잡아오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는 말이 있었다.

이 사건 이후 밀폐된 공간에 두 명의 용의자는 서로에게 목격자가 될 수 없다.



12년만의 재수사와 용의자 검거

 


2009년 11월, 서울중앙지방검찰청 외사부의 요청에 따라 법무부에서 유력 용의자로 지목된 패터슨에 대한 범죄인 인도 청구를 미국에 하였다.

전술한 바와 같이 2009년 기준으로 공소시효가 3년이 남아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기소가 가능하나, 일반적인 경우 범죄인 인도 청구에 오랜 시간이 걸리고, 이미 십수년이 지난 상태라 증거 확보에 어려움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결국 2011년 10월 10일, 패터슨이 공소 시효를 약 6개월 남겨두고 미국에서 잡혔다. 당시에는 공소시효가 6개월여 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라 정부의 강력한 의지와 외교력 발휘가 없다면 시간이 오래 걸릴 게 뻔했다.

그리고 언론보도를 통해 패터슨이 범행을 시인했다.라는 사실이 드러나 파문이 일었다. 물론 공권력에다 시인한건 아니고, 당초 범인으로 지목되었던 리와 또 다른 친구와 함께 LA에서 만났었는데 이 자리에서 패터슨은 여러 차례에 걸쳐서 자신이 그를 찔러 죽였다.라고 자랑을 했다는 것. 그리고 한국 정부를 조롱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 사실은 그 자리에 동석했던 다른 친구가 언론과 인터뷰를 하면서 까발려졌다. 또한 에드워드 리는 유족에게 편지를 전해 달라고 했는데 사건에 대해서 유족에게 죄송하다라고 하면서 패터슨이 범인이라는 증거를 미국 검찰에 제출하겠다.라고 언급했다고 한다. 미국 검찰은 속지주의 원칙에 의거하여 패터슨이 범인이 맞다면 한국에서 처벌받아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2011년 11월에는 미국 법정에서 패터슨의 송환절차 재판이 진행되었는데 그는 "나는 한국에서 형기를 다 살고 나왔으니 도주가 아니다."라면서 2012년 4월로 공소시효가 끝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한국 검찰은 공소시효가 끝나기전에 패터슨을 살인혐의로 기소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검찰에 의하면 신병을 인도받기 전에라도 먼저 기소를 하면 공소시효의 의미가 없어진다라는 것. 송환절차 재판이 2012년 4월을 넘길 것이 분명한 상황이라 그가 재판을 끌어서 공소시효를 넘기기전에 못을 막아두겠다는 의도로 풀이된다.

그래서 2011년 12월 검찰은 보강 수사를 통해 범인으로 보고 기소하여 공소시효가 정지되었다. 검찰은 진술 분석을 통하여 리가 패터슨에게 범죄를 저지르라고 시키고, 칼을 주고 주변 동향을 감시하였고, 목을 여러차례 찌른 것은 패터슨인 것으로 분석됐다고 밝혔다.





이렇게 해서 2012년 10월 23일, 용의자의 한국 송환이 결정되었다. 이에 용의자는 결정에 불복해 인신보호 신청을 냈다. 취지는 한국에서 이미 무죄 판결을 받았기에 송환이 일사부재리의 원칙에 어긋나고, 진범이라는 증거가 부족하며, 공소시효마저 만료됐다는 기존 주장을 되풀이했다. 그러나 2013년 8월 11일 1심에서 패소하였다고 한다.

송환 재판은 LA 연방법원에서, 인신보호 재판은 캘리포니아 주 법원에서 심리하였으며, 미국의 경우 두 법원이 모두 3심제로 구성되기 때문에 캘리포니아 주의 고등법원과 대법원의 판단을 더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었다.

2015년 5월 7일 항소심도 기각했다. 이 때문에 송환되는가 싶더니 2015년 6월 30일 패터슨의 국내 송환 일정이 연기되었다. 이의신청서를 제출해서 재심결과를 기다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7월, 재심도 기각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패터슨은 실수를 했다. 범죄인 인도 결정의 집행정지 신청을 하지 않은 것. 각 심결 이후 2개월 이내에 집행정지 신청을 연장해야 하는데, 항소심에서 패한 이후에 신청을 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연장 기한을 넘기면서 집행정지 처분의 효력이 소멸해 송환이 가능해졌다. 다만 미국 정부가 송환 가능 시점이 되자마자 바로 송환한 걸 보면 미국 측에서도 페터슨을 유력한 용의자라고 판단하고 있었기에 의미가 없었다는 평가도 있다.

결국 2015년 9월 19일에 미국 로스엔젤레스 법원의 판결에 따라 미국도 송환에 동의했다. 이에 법무부는 23일 새벽 4시40분 아서 존 패터슨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인천국제공항으로 송환할 예정이라고 22일 밝혔다.

23일 오전 4시 26분 아서 존 패터슨이 한국으로 송환되었다. 공항에서 취재진에게 "유가족들은 고통을 반복해서 겪어야겠지만, 내가 여기에 있는 것도 옳지 않다."며 재차 자신의 혐의를 부인하였으며, 에드워드 리가 범인이라고 주장하였다.

다만 패터슨이 유죄를 받더라도 양형은 에드워드 리가 받았을 때와 같거나 그보다는 가벼울 것으로 보인다. 에드워드 리가 1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가 항소심에서 20년형을 선고받은 이유는 사건 당시 만 18세를 넘기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이다. 패터슨도 사건 당시 만17세 소년이었으므로 선고 가능한 최고형이 징역 20년이고, 이미 별도의 혐의로 복역했기 때문에 그걸 빼줘야 하고, 미국에서의 송환재판 수감 기간 및 앞으로 재판을 받는 동안의 구속 기간도 제외해야 하는 등의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패터슨 본인도 유죄를 정 면할 수 없다면 이 점을 적극적으로 강조해 양형을 최대한 줄일 가능성이 높다. 다만 검찰은 패터슨에게 징역 20년을 구형하면서, 미국에서의 구금 기간을 양형에 반영하는 것에 반대 입장을 제시해 좀 더 지켜봐야 할 필요가 있다.

일단 패터슨은 재판을 피할 수 없다고 판단되자 한국에서 오병주 변호사를 선임하는 등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나섰다. 또한 18년이나 지났기에 증거 보전도 쉽지 않은 관계로 재판이 길어질 가능성이 매우 높으며, 재판에 증인으로 불려나올 에드워드 리 및 그의 친구 최씨와의 법정 싸움 역시 변수가 될 것이다.



2016년 1월 29일 오후 2시부터 진행된 판결에서 일단 재판부는 패터슨에게 살인죄로 유죄판결하고, 에드워드 리에 대해서는 다른 사람이 들어오나 감시하려고 간 것이라고 판단되므로, 검찰의 주장대로 공범으로 볼 소지가 충분히 있다고 판단하였다. 그리고 검찰의 구형보다 더 무거운 무기징역을 선택한 뒤, 1997년 당시 특강법상 소년범 처벌규정을 적용하여 법정 최고형인 징역 20년을 선고하였다. 한마디로 패터슨이 저지른 범죄가 서울 신촌 대학생 살인사건에서 이뤄진 다수의 청소년이 주도한 계획적 범죄와 동급의 악행이라고 판단했다는 뜻. 단 패터슨은 이전부터 무죄를 주장했으며, 바로 항소하겠다고 밝혔다.



에드워드 리에 대해서 공모자로 가담한 것으로 평가했으나 이미 그는 대법원에서 살인죄에 관해 무죄판결을 받았기 때문에 일사부재리의 원칙에 의거 이미 살인자로는 판결이 끝나 정식 재판을 할 수 없고, 공모 혐의는 이미 공소시효가 지났음을 유족들은 안타까워했다. 이로써 그가 진범인지 유무는 영원히 미스터리로 남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