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지 유신
일본의 정치, 경제, 사회를 서구식으로 완전히 뒤바꿔 놓은 개혁
19세기 말 일본의 에도 막부가 서양의 개항 압력에 견디지 못하고 쿠로후네 사건으로 조약을 체결하자, 이에 반발한 막부 타도 세력과 왕정 복고 세력에 의해 막부가 무너지고(1867년의 대정봉환) 덴노 중심의 국가로 복고된 대사건을 말한다. 대개 개시 시기는 메이지 연호가 시작된 1868년으로 본다.
한국에선 한자음 그대로 명치유신(明治維新)으로도 부르며, 일본에선 그냥 유신이라 부르기도 한다. 일본어로는 '메이지 이신(めいじいしん)'이라고 발음하며 영어권에서는 Meiji Restoration이라고 쓴다. 다만 메이지 유신이라는 말은 현대에서 쓰이는 역사 용어로, 당시에는 '어일신(御一新, 고잇신)' 등으로 불리었다.
유신 3걸(사이고 타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 기도 다카요시)로 대표되는 신흥 세력에 의해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인 일본은 동아시아의 강국으로 성장하게 된다. 이와쿠라 토모미는 그 중에서 최강의 흑막. 물론 그 배후에는 또 조슈 번의 요시다 쇼인이 있었고, 그의 제자들이 에도 막부를 타도하고 개국을 추진하게 되니 가장 큰 공로자는 요시다 쇼인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분명히 당초 목표는 존왕양이를 하면서 문자 그대로 막부를 타도하고 고메이 덴노를 중심으로 쇄국을 진행하자는 것이었는데, 왜일까 도중에 방향이 바뀌더니 사쓰마의 코마츠 타테와키의 삿쵸 동맹 → 삿토 맹약 → 사카모토 료마의 신정부강령팔책에 따라 도쿠가와 막부를 타도한 직후에 전면 개국을 해버린다는 괴이한 결론이 나와버렸다.
다만 이렇게 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정변을 주도한 것은 사츠마와 조슈 두 번인데, 막부와의 공무합체(公武合体)파로 잔류하고 있었던 사쓰마는 번 소속의 무사가 사소한 무례를 이유로 영국 상인을 살해한 것이 계기가 되어 사쓰에이 전쟁이 발발하였다.(그 이후로는 반막부 세력(신정부군)과 영국 상인들만으로의 무구(武具), 조선(造船) 통상을 시작하게 되었다는 개군(改軍) 현상을 돋보였다.) (사쓰마와 달리) 조슈는 도막(막부 토벌) 정신으로만 일관. 존왕양이 의식을 일으키고 1864년에는 아예 시모노세키를 항해하는 4개 외국 양선(미국,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에 발포하기까지 했으나, 곧 열강의 보복으로 국력의 격차를 실감하고 도막 정책으로 항거하는 개국만이 유일한 해결책임을 깨닫게 되었다.
또한 전면 개항을 한 것도 이 때의 경험으로 볼 수 있다. 사실 일본도 막부 체제 하에서 어느 정도 서양화가 이뤄졌지만, 화혼양재라는 명목 하에 그다지 큰 성과를 내지 못했다. 이에 일본은 서양에 이와쿠라 토모미, 이토 히로부미 등 대규모 사절단을 파견하여 직접 견학하고 많은 걸 배웠다. 이들이 내린 결론은 전면 개방 외에는 답이 없다는 것이었고, 결국 일본은 폐번치현, 신분제 폐지, 국민개병제 등 전면적인 서양화에 착수했는데 이 판단이 옳았다. 구 체제 하에서 개방을 추진했던 청나라와 조선은 모두 개혁에 실패하였는데 그로 인해 청은 반 식민지 종속국이 되었고, 조선은 일본에 강제 합병을 당하였다.
물론 일본에서도 사가 번 → 히고(구마모토) 번 → 아키쓰키 번 → 조슈 번 순으로의 사족 반란이 들이닥쳤다. 그 이후로도 정한론 무산 결과와 산발탈도령(단발령+폐도령)에 항거한 사쓰마 번 무사들은 특권 계급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사이고 다카모리를 중심으로 뭉쳤고, 이들이 일으킨 반란이 바로 서남전쟁(현재까지로의 일본 열도의 마지막 내전)이다.
위 그림은 (대정봉환 당시를 묘사한 그림은 아니고, 이로부터 22년 뒤) 일본제국 헌법 제정(1889년)을 묘사한 그림이다. 엄밀히 말해 메이지 유신 이전 에도막부 말까지만 해도 저런 서양식 제복을 입은 일본 관료는 없었다고 보면 된다. 다만, 메이지 유신이 특정한 시기에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긴 시간에 걸쳐 진행된 일련의 '과정'이므로 저 그림이 메이지 유신을 묘사한 그림이라는 사실은 변함 없다.
한국에 미친 영향
이 때 국서(서계)의 발신자가 쇼군에서 덴노(천황)로 바뀌게 되었는데, 이미 청나라는 아편전쟁으로 서양 열강에 얻어 맞고 있었다. 청나라는 개항한 이후였기 때문에 근대적 외교 관례에 맞춰 조약을 체결하여 별 문제가 안 되었지만, 아직 통상수교를 거부하고 있던 흥선대원군 집권기의 조선에선 조선이 준 도서(圖書)가 아닌 이번에 새로 만든 도장을 사용한 점과 천황, 황조 등 청나라가 사용할 수 있는 황칙의 용어를 쓴 것에 심히 불쾌해 하며 국서(서계)의 접수 자체를 거부해버렸다. 1868년에 일어난 이 사건은 국서 거부 사건(서계 거부 사건)이라고 불리게 되었고, 이후 일본은 다시 조약을 맺자고 제의했지만 흥선대원군은 또 거부했다.
1872년엔 이 때문에 소요 사태까지 일어나는 바람에 정식으로 국교가 단절되기까지 했으며 이미 조선 통신사가 50년 간 없었다는 점에서 근세 조-일 관계가 막장화된 시점이었던지라, 이에 더욱 격노한 일본 내에서 정한론이 힘을 얻게 되었다. 이후 조선에선 흥선대원군이, 일본에선 정한론 강경파가 실각하면서 두 나라 모두 여러 차례 협상을 시도했지만 계속 결렬되다가 운요호 사건이 일어났고, 그 이후 조선침략이 본격화 된다. 물론 일본 내에서도 정한론은 찬반이 나뉘었지만 강경파와 온건파의 차이(시기를 언제로 할 것인가)일 뿐, 이미 에도 막부 말기에 정한론이 대두되기 시작했다. 메이지 유신의 급격한 중앙집권화로 인한 몰락 사무라이의 불만을 외부로 돌리고, 해외 식민지 건설을 통해 부국강병을 모색하면서 '언젠가' 조선을 침략해야겠다는 게 대세였던 듯. 그리고 이때 가지게 된 악감정의 영향으로 '일본은 상국, 조선은 하국'이란 인식에 일본 내에서 고종과 명성황후 민씨를 가리키는 명칭으로 '이왕'과 '민비'가 등장했다. 당시와 일본이 조선을 강제병합했을 동안엔 큰 문제가 아니었지만, 8.15 광복이 온 이후 대한민국에서 의외의 부분에서 은근히 복잡한 문제를 일으키는데 영향을 줬다고 한다.
한국현대사의 가장 큰 사건인 10월 유신은 메이지 유신의 '유신'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조선과 일본의 운명을 가른 차이
21세기 사람들의 눈으로 평가하자면, 분명한 명분과 방향을 가지고 과감하고 모든 범위에 걸친 개혁을 추진하여 이를 단기간에 성공시켰느냐(메이지 유신 당시 일본), 아니면 오히려 나라 문을 걸어 잠갔다가(흥선대원군 치하 조선) 뒤늦게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어설픈 개혁을 시도했느냐(개항~을사늑약까지의 조선) 여부가 양국의 운명을 갈랐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일본의 경우 어설픈 개방으로 서양의 침탈을 가속화시켜 나라를 망국으로 몰고 가던 막부를 사쓰마, 조슈 등의 네 개 번의 실력자들과 하급 무사들이 저지하는 데 성공, 구체제 자체를 갈아 엎었다. 이들은 그 대안으로 덴노를 전면에 내세웠지만, 그러면서도 신격화는 시켰지만 정작 권력은 내주지 않았기 때문에 실질적인 권력은 여전히 신정부의 실력자들에게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 권력을 이용해 총체적인 서구화라는 확실한 목표를 향해 모든 것을 빠른 속도로 바꿔나갔고 이에 대한 저항도 거의 없었다. 보수적 인물로 알려진 사이고 다카모리만 해도 개방 자체는 동의하되 좀 더 천천히 하는 한편, 사무라이 주도 체제를 유지하자는 정도의 입장이었다.
반면 조선에서는, 세도정치기의 문벌가문들은 외부 상황에 별 관심도 대책도 없었고, 흥선대원군은 내치에는 힘을 썼지만 서양에는 거부적인 태도를 드러냈으며, 흥선대원군 실각 후에도 고종을 위시한 조정은 반강제로 개화의 삽을 떴지만 그 의지나 방향도 명확치 않았고 전개도 지지부진했다. 그나마 김옥균 등 일부만이 다소 깨어 있었다지만 이들은 스스로 개혁을 하는 게 아니라 일본을 끌어들여 개혁을 하고자 한 점에서 한계가 명백했다. 당시 근대화를 이끌어나갈만한 이른바 개화파라 부를만한 인사는 당시 조정에는 박규수가 유일했고 민영익, 김홍집, 김옥균 같은 훗날 이름을 날렸던 개화파 인사들은 1870년대쯤에나 막 30대에 관직에 오르기 시작했던 사람들이다.
또한 단기적인 배경을 떠나 보아서 보다 근본적이고 구조적인 측면에서도 문제를 살펴볼 수 있다. 가령 일본은 16세기인 전국시대 때부터 지방/중앙 정부 차원에서 유럽과 직접 교류를 해오며 가톨릭을 받아들이거나 조총과 같은 근대식 기술을 도입하였고 에도 시대에는 비록 쇄국을 했으나 유일하게 교류가 허락된 네덜란드로부터 주기적으로 들어오는 세계 정세에 관한 최신 정보(오란다 풍설서)와 난학을 통해 지식인층 뿐만 아니라 일반 민중들에게도 서양의 사상과 문물이 천천히, 그러나 확실히 주입되었다. 이러한 일본의 사상적 변화는 에도 시대 중·후기에 파견된 조선 통신사들에게 큰 위화감으로 작용했을 정도로 지대했다. 일반적으로 막부가 서양화를 거부하고 4번이나 거부한 끝에 개방했다는 인상이 짙지만 실상 막부 역시 서양화를 꾸준히 추진했다. 단지 중국의 중체서용. 조선의 동도서기와 동의어인 화혼양재가 기준이었을 뿐이다. 그나마도 수준이 넘사벽이었던 것이, 일본은 사츠마같은 일개 '지방'도 증기선을 20척 가까이 보유했던 데에 비해 조선은? 대한제국 시대에야 양무호와 광제호가 전부였다.
외국어 통번역문화가 발달했다는 점도 상당히 중요한 점인데, 비록 막부가 쇄국 정책을 유지했을지언정 에도 시대 중후기에 이르면 수많은 난학숙(네덜란드 학문을 가르치는 학교)이 설립되어 민간인이 네덜란드어 의학서를 완역하거나 네덜란드 상인들의 거류지인 데지마에서 흘러나오는 소식들을 통해 세상 물정을 대충 접할 정도였고, 또 대대로 네덜란드어를 통번역하는 가문들이 생겨나기도 했다. 덤으로 영국, 미국, 프랑스 등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나라의 사람들과 교류할 때도 영어와 프랑스어를 네덜란드어를 거쳐 간단하게 의사소통할수도 있었다. 반면, 조선은 서양의 언어를 알아듣지 못해 항상 청나라를 통해야만 했고 청나라에서 번역된 문서가 오기까지 엄청난 시일이 걸렸기 때문에 교류는커녕 의미 있는 의사소통을 하는 것조차 힘들었다. 이것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가 바로 유명한 헨드릭 하멜의 표류이다. 조선은 그들이 어느 나라에서 왔는지조차 몰라서 그저 "남만인(南蠻人)"이라고만 부르고 별 관심을 보이지도 않았지만, 13년 뒤 하멜 일행이 조선을 탈출해 일본 나가사키에 이르렀을 때 나가사키의 '총독(부교)'은 네덜란드어->포르투갈어->일본어 통역을 통해 그들을 심문한 결과 금방 그들의 정체 및 표류, 억류, 탈출 과정 전부와, 덤으로 당시 조선의 내부 사정(!)까지 상당히 세세한 수준으로 캐냈다. 일개 무역도시의 행정관이 일국의 국왕보다도 많은 정보를 손에 얻었다는 뜻.
결국 조선은 서양과의 교류를 직접 못 하고 중국이나 일본을 통해 간접적으로 하는 양상이 더 짙었다. 동시대 조선과 일본에 (의도적이든 의도적이지 않든) 도착한 양인들의 수가 크게 차이 나며, 일본까지 가는 항로가 개척된 이후에도 조선은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이유이다. 이 때문에 조선은 직접적으로 양인들과 교류하는 선택을 할 수도 없었다. 벨테브레와 헨드릭 하멜 일행의 표류와 같은 기회가 있었지만 비슷한 사례가 있던 일본과는 달리 조선은 그들로부터 서양에 대한 정보를 알아내거나 다른 서양인들과의 대화 창구로 사용하지 못했고 그들로 인해 서양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는 일도 없었다.
그리고 일본과 조선의 국력차도 명백했다. 조선에서는 일본을 왜적이니 오랑캐니 하면서 무시했지만, 일본의 총 국력은 아무리 늦어도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해서 엄연히 조선의 그것을 뛰어넘은 상태였다. 메이지 유신 당시 시점에서 일본과 조선의 경제력 차이는 4:1에 이르렀다. 애초에 인구도 일본이 조선의 1.5~2배나 되었고, 영토의 차도 대략 그 정도였는데다가 농업 조건도 일본이 더 좋은 편이었다. 상공업의 측면에서도 전국시대 이래 꾸준히 상공업이 발달했으며, 도시화율도 더 높았고, (쇄국정책에도 불구하고) 대외 무역도 더 활발했던 일본이 조선을 앞지른 지 오래였다.
마지막으로 정부 재정 규모를 볼 경우, 일본은 통상 35%, 조선은 10%을 좀 넘기는 바 정부재정에서 상당한 차이가 발생했다. 조선은 대단히 빠듯하게 재정을 운용하는 나라였기 때문에 잉여재정이 거의 나오지 않았고, 이는 급작스러운 외부의 위협에 빠르게 대처하기 어려워지는 한 요인이 되었다. 정부가 세금을 최대한 덜 걷어 운용한다는건 농민들에겐 더 좋았겠지만... 조선 후기 민란의 잦은 발생은 과도한 세금(관리들의 부정축재, 재정난 등)이 부여되면서 발생한 성격이 크다. 이에 비해 일본의 경우 에도 막부의 캐치프레이즈가 농민은 살려만 둔다일 정도로 처음부터 강한 세제를 운영하고 있었다.
그리고 위의 요소들에 비하면 부수적인 요소이지만, 시기의 '행운'이란 면도 있었다. 메이지 유신이 일어나기 직전에는 일본의 각 번들이 서로 대립하고 여기에 막부와 토막파까지 대립하는 분열 양상을 보였다. 이 때 서구 열강이 개입해서 더욱 분열을 조장했다면 일본의 근대화는 요원했을 것이다. 그런데 무진전쟁 등 일본의 분열이 극에 달한 1860년대 무렵의 시기는, 하필이면 미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 주요 서구 열강들이 모두 일본에 신경을 쓸 수 없던 시기였다. 미국은 남북전쟁이 한창이었고, 영국은 세포이 항쟁 및 애로호 사건으로 인한 제2차 아편전쟁, 태평청국 운동 등으로 인해 인도와 중국에 눈길이 가 있었다. 프랑스는 멕시코 내전 개입, 베트남 침략,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으로 인한 중부 유럽 정세의 변화 등으로 바쁜 상태였다. 러시아 역시 이제 막 연해주를 차지한 상태인데다 그레이트 게임이라는 영국과의 대립 상황으로 인해 아직 일본에 관여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반면 조선이 개항할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다. 이미 서구 열강들의 관심도는 충분히 한반도로 돌릴 여유가 있었고, 정한론이 대두된 일본 뿐만 아니라 청나라 역시 조선에 대해 기존의 조공 체제가 아닌 근대적인 종속 체제의 형태로 영향력을 뻗으려고 시도하는 상태였다. 조선과 일본의 운명의 차이에는 이러한 '행운'의 차이도 분명 작게나마 작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