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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사회.정치.역사.인물

조선시대 조상들이 고봉밥을 먹은 이유

 

조선은 농업 국가였고 주식도 특히 쌀이었기에 탄수화물 섭취는 그럭저럭 괜찮았을지 모르지만, 다른 영양소에 비해 단백질 섭취가 부족했다는 주장도 있다. 밀이 쌀보다 70% 정도 많은 단백질을 가지고 있기에 쌀 섭취 국가는 똑같이 주식인 곡물만 섭취하더라도 단백질 섭취에 불리하다. 이는 대식하는 식사 사진에서 유독 밥은 어마어마한 데 비해 반찬은 보잘 것 없다는 것이 근거가 된다. 다만 밀의 단백가는 쌀보다 낮아서 실제 단백질의 효율성은 쌀이 더 높음도 감안 해야한다.

다른 가설로는 미곡의 저장 방식이 발달하지 못해 저장기간이 길지 못하고, 유통망의 문제로 각 지역에 골고루 분배되지 못하므로 먹을 수 있을 때 먹어둬서 칼로리를 비축해두려는 풍조가 만연했었다는 가설과, 이 시기는 노동 및 교통수단이 발달하지 못해 사소한 용무조차 육체노동을 수반할 수밖에 없으므로 저 정도 칼로리를 축적해둘 수 밖에 없다는 가설이 있다. 하지만, 농경사회였던 시절에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성별을 불문하고 고된 노동을 하는 경우가 많았고 금방 배가 고파지기 때문에 그만큼 많이 먹는 것이 당연했는지도 모른다.

3면이 바다인 반도 국가이니 생선을 단백질 대체재로 쓸 수 있지만, 안그래도 평지가 별로 없고 산지가 많은데다가 조선시대에는 상공업을 천대했기 때문에 내륙 지방에서 생선값이 높았을 것이다. 오죽하면 박지원이 "생선 내장을 바닷가에선 거름으로 쓰는데 서울에선 한 줌에 한 푼이냐"라고 할 정도. 그래서 나온 결과물이 간고등어, 건어물, 젓갈 등... 그러나 이런 것만으로 충분한 육식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특히 조선시대가 500년임을 감안했을 때 한해 두해 푸짐하게 육류가 공급되었던 때는 작게나마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저술은 그런 시기에 남겨진 것일 수도 있다.

사실 유럽은 토지에 비해 낮은 인구 밀도, 발전한 도시와 상업망, 그리고 어업에 대한 강한 의존, 목축업과 농업의 복합적인 발전 덕분에 농업 생산성이 동아시아에 비해서 매우 처참했음에도 불구하고 단백질 섭취량은 비교적 양호했다.

한민족은 동북아시아인(몽골로이드) 중에서 몽골인과 함께 체격이 가장 큰편에 속해서 필요한 열량이 상대적으로 많았는데, 고기가 위주인 몽골 요리를 먹어 단백질과 지방이 풍부하게 공급되는 몽골인보다 많이 먹은것도 근거가 된다. 특히 억지로 열량을 체우기 위해 쌀을 퍼먹어 과도한 탄수화물 공급으로 조선시대에도 성인병인 당뇨(소갈병)을 앓는 사람이 속출했다고 기록하고 있는 반면 몽골인들은 고기 위주의 식단으로 현대에도 한국인보다 적게 먹고 성인병도 적다. 실제로 육식 위주의 식단은 채식 위주의 식단보다 훨씬 효율이 좋아 조금만 먹어도 열량을 확보할 수 있다.

정말로 조선시대 때 단백질 공급이 풍부했다면 동시대에서 신장이 전세계 다른 나라 사람들을 압도해야하는 것이 맞다. 최소한 그게 아니더라도 대한민국 국민의 유전적 평균 신장 한계점으로 평가되는 남 173~174cm, 여 160~161cm에 도달했어야만 한다. 하지만 위에 나온 기사 자료를 보면 전세계적으로 비교했을 때 한국인의 신장은 매우 작은 축에 속했고 유전적 신장 한계점인 174cm, 161cm에는 택도 없이 부족한 키다. 유전적 차이를 가정하더라도 한국인들은 서양인들에 비해서 작은 편이다. 특히나 기사에 나온 포르투갈은 그 당시 키는 최소 우리보다 5cm가 더 컸을 것으로 추정되나, 현재 2020년대 한국인의 평균 키는 남자 기준으로 포르투갈보다 크다.

뿐만 아니라 여성 기준으로 볼 때 평균 키가 큰 최근 100년간 제일 많이 자란 국가 중에 하나가 대한민국이다. 이 시기의 평균 키라는 것은 일제의 수탈로 인하여 줄어든 시기라고 보기 어렵다. 이제 막 일제의 수탈이 시작된 시기였다. 이 시기의 저신장 및 유전적 한계점 키까지 도달하지 못한 이유는 단백질 공급 및 영양 공급이 굉장히 좋지 않았다는 것이다. 조선시대 전체를 통틀어 좋다고 할 수는 없어도 최소한 조선 말기에 있어서 대한민국의 단백질 공급은 굉장히 열악한 실정이었다.

조선 후기 농업사를 연구한 논문이나 학술서를 봐도 1인당 곡물 생산에서 특별히 주변국(중국(청), 일본)에 비해서 조선은 우위를 가지지 못했다. 이러한 학술서에서도 지적하는 것은 공통적으로 조선은 도시 산업 발전이 미비해서 농촌에 잉여인구가 지나치게 많았다는 점인데, 청, 일본은 그러한 부분에서는 조선보다 우월했다. 바꿔 말하자면, 청과 일본은 농촌에서 생산된 곡물이 도시 인구 부양을 위해서 흘러가느라 농촌 사람들이 먹을 식량이 줄었다면, 조선은 도시가 딱히 발전하지 않고 농촌에 백수가 많았기 때문에 그런 농촌의 하류층들이 쫄쫄 굶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한국사 데이터베이스의 <조선 중기의 경제> 혹은 <조선 후기의 경제>에서 서술한 당시 조선의 기근 및 유랑민의 발생은 큰 골칫거리였다. 해외 선교사들이 방문한 조선의 가호는 대부분 토지와 주택을 가진 최소한의 중산층이었기 때문에 식사량이 많은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던거고, 그들보다 하류층인 조선 민중들은 기아에 시달린 것이다.

소고기 이외의 고기 섭취량이 적었음을 감안하면 전체 고기 섭취량은 적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내륙 지방에서 해산물 섭취량은 뻔했을거고, 조선은 돼지고기를 거의 먹지 않았다. 개를 잡는 것이 소를 잡는 것보다야 훨씬 만만하긴 했어도 개는 빨리 자라는 편도 아니고 고기가 많이 나오는 편도 아니다. 닭도 지금처럼 많이 기르지도 않았고 다 늙어서야 겨우 잡았다. 계란의 크기는 지금보다 조금 작았으며 지금처럼 매일 하나씩 낳지 않고 나흘에 하나 꼴로 낳았기에 계란도 흔하지 않았다.

게다가 조선시대의 소고기 섭취량에 대한 계산이 매우 이상하게도 소의 마릿수를 인구수로 나눈 추정값인데, 이 추정값에서 소의 마리 당 무게를 현대 한우랑 비슷한 600kg으로 잡고 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까지 한우의 무게는 200kg 내외였으며 더 따져야 하는 것이 한우 중량이 200킬로 나간다 해서 이게 다 고기가 되는 게 아니라 뼈, 가죽 같은 못 먹는 부위를 제외하면 고기량은 무게의 3할밖에 안 된다.승정원일기의 하루 도축량 천여마리를 인정한다 해도 평균 소비량이 400g 정도밖에 안된다.

또한 사람들이 소고기를 많이 먹어서 문제라는 조선시대 학자들의 기록은 말그대로 그냥 학자들이 자신의 감상을 남긴 것일뿐이지 아무런 통계적인 근거가 없는 말이다. 조선의 고위층 일부 혹은 몇몇 백성들이 많이 먹은 것을 가지고 본인의 감상을 남긴 것 따위를 근거로 많이 먹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비약이다. 그리고 당시 기준으로 주요 자산중에 하나인 소고기를 잡아먹는 것은 집안의 대들보를 팔아 굶주림을 면하겠다는 차원과 동일해 보였기 때문에 좀 더 비판적으로 말했을 가능성이 있다.

혹여 만에 하나 풍족하게 먹었던 해가 있었을지언정 심지어 조선왕조는 500년이나 지속된 왕조다. 대한민국은 건국된지 고작 70여년정도 된 나라다. 500년간 서너해 풍족하게 먹은 것 가지고 조선 전체를 통틀어 잘먹었다라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일 것이다.

결정적으로 한반도 역사를 통틀어봐도 현대시대 이전에 고기가 풍족했던 적은 단 한번도 없다. 현대시대에 이르러 축산업의 발달 및 수입산 육류의 도입으로 인하여 육류의 섭취가 그나마 늘게 된 것이다. 현대시대 이전의 사람들의 부족한 단백질의 섭취는 강이나 바다를 접하고 있다면 생선이나 조개 등으로 섭취가 가능하였지만 내륙지방의 경우 육류의 섭취가 지극히 제한적이였기에 콩을 이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냉장시설과 유통시설이 없었던 시대에는 콩을 이용한 된장이 단백질의 섭취수단이였다.

만일 한반도에 고기가 풍족하였다면, 한국의 고기요리는 미국이나 남미처럼 바비큐요리가 발달하였을 것이다. 한국의 고기요리는 부족한 고기로 최대한 배를 채우기 위한 국이나 탕 위주의 국물요리가 대다수였다. 물론 한국 고기요리에 구이 문화가 없던 것은 아니지만 서구식 고기 요리에 비해 고기를 얇게 저미는 성향이 나타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