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9월 1일, 신임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가 부임했다. 그는 여러모로 전임 그리고 뒤에 올 조선총독들과 달랐다. 유일한 해군대장 출신이며 해군 주요 파벌인 사츠마 출신이 아닌 이와테가 고향으로 본인 능력만으로(물론 연줄이 어느정도 있었지만) 성공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미국공사관에 무관으로 나간 적도 있어서 당시 다른 일본인 고관들보다 서방세계에 대해 잘 알았고 어느 정도 유연한 사고를 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성품은 검소하고 소탈했으며 편지 쓰기를 좋아했다.
부부가 같이 조선에서 생활하는걸 외부에 공개함으로서 신사적인 모습을 보여주려 노력했다.
그러나 그도 어쩔 수 없는 일본인 총독으로, 교묘하게 조선을 억누를 방법만 생각하던 사람이었다.
사이토는 9월 2일 경성(서울) 도착해 부임식 마치고 관저로 가기 위해 마차에 올라탔다. 그런데 누군가가 던진 폭탄이 그 뒷 마차에 맞으면서 정무총감, 호위 군경과 취재기자, 환영차 나온 총독부관리 등 37명이 사상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정작 목표였던 총독은 다치지 않았다. 그 폭탄은 65세의 노인이었던 강우규 의사가 투척한 것이었다. 처음 경찰은 강우규 의사를 체포했지만 이런 늙은이가 폭탄을 던졌을 리가 없다고 생각해 풀어줬다. 그러나 노인이 폭탄을 투척했다는 제보가 들어와
사건발생 15일만에 강우규 의사를 다시 체포, 이듬해 사형이 집행되었다. 의사에게는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정작 총독 본인은 자신이 목표였다는 사실에도 그다지 화를 내지 않았다고 한다. 조선군사령관을 비롯 치안관계 담당 고위관리들이 다 쩔쩔매며 사과하는 자리에서도 앞으로는 조선인들에 대해 너그럽게 대해야 한다는 훈시를 했다고 전해진다.
실제 일본 내각에서도 3.1운동 등으로 받은 충격으로 인해 더 이상 강압적으로 통치하기는 어렵다는 결론을 내린 상태였다. 그래서 사이토는 조선에 부임하고 얼마 안되어 통치 방침을 전환하는데 1930년대 일본이 만주 침공하면서 막 나가기 전까지 이 기간을 흔히 문화통치시대라고 한다.
지금까지 조선의 치안은 헌병이 맡았다. 그러나 이제는 헌병이 아닌 경찰이 치안을 맡게 되고 일절 허용되지 않았던 조선인의 언론(신문)사 설립이 가능해지고 출판의 자유도 어느 정도 풀어줬다.
회사 개설도 기존의 허가제에서 신고제로 바뀌었다. 또 조선인 성인 남자에 대해 지방행정에 한해서지만 부분적으로 투표권을 보장했다. 조선인에게 신문 발행을 허용하는데 있어서는 총독부 내부에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많았다. 하지만 총독이 하겠다는데 부하들이 말릴수는 없었다. 이 때 창간되어 지금까지 발행되는 신문이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다.
하지만 이렇게 조선인의 환심을 사는데 부지런한 것처럼 보여도 그 속에는 다 음흉한 계획이 숨어있었다. 헌병이 없어졌다지만 대신 경찰이 3배 이상으로 증강되어 이제는 시골마을에도 주재소(파출소와 유사한 개념)가 들어서 이제 경찰이 주민들을 감시했다. 거기다 조선인이 발행하는 신문이 생겼지만 총독부가 언제든 검열할 수 있었으며 정간에 대한 권한도 가지고 있어 걸핏하면 정간에 처했다. 그리고 그 투표권이라는 것도 5원 이상의 세금을 납부하는 사람에게만 주어졌는데 당시 5원이면 고급 수입 양장 한벌을 맞출 수 있는 - 지금 구매력으로 약 50만원 상당 - 돈이었다. 일반 소작농들은 빚지지 않는이상 만져볼 수 없는 거금이었으므로 사실상 친일파와 그 부역자들에게만 투표권이 주어지는 것과 같았다. 그리고 선출된 사람들도 지방 행정관서의 들러리에 불과했으며 힘은 없었다.
그런데 더 어이없게도 이게 먹혀들어가 상당수 민족주의 세력이 친일파로 변절했다. 대표적인 예로 이광수와 최린, 최남선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일제의 방침에 동조했고, 자치론 등을 설파하며 독립에대한 열기를 흐리려 들었다. 물론 대다수의 양식있는 사람들은 속지 않았다.
1920년부터 산미증식계획이 실시되어 개간과 수리시설 정비 등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사업이 진행되면서 확실히 쌀의 생산량은 늘어났지만 늘어난 양 이상으로 일본에 수출되어 조선인이 배불리 먹는일은 없었으며 개간/방죽사업등에 많은 사람들이 반 강제로 동원되었다. 거기다 이런 공사를 하는데도 터무니없이 싼 임금으로 사람들을 착취하였으며 비료 등을 강매하여 일본회사의 배를불렸다. 대부분이 소작농인 농민들은 점점 높아져 가는 소작료와 각종 잡비에 고통받아야 했다.
이로 인해 득을 본 것은 지주들뿐이었다. 다만 이 정책은 일본 내에서도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조선 쌀이 유입되면서 일본 농가들이 손해를 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중에는 전쟁으로 인해 식량사정이 악화되면서 더 가혹하게 조선을 착취하게 된다.
조선 민중들은 이 '문화통치'에 속지 않았다. 3.1운동은 실패하였지만 그 불씨는 살아남아 1920년대는 더 가열찬 항일투쟁이 전개됐다, 의열단이 결성되어 한반도 내에 있던 일제의 중요 통치기관에 잇따라 폭탄을 투척하였으며 1924년에는 김지섭 의사가 일본인들이 신성시하는 일본 왕궁(고쿄)에 폭탄을 던지는- 아쉽게도 불발탄이었다 - 사건까지 발생했다.
만주에서도 김좌진 장군, 홍범도 장군 등이 연합한 독립군이 일본 정규군과 싸워 승리했다. 다만 독립군은 병력이 그리 많지 않아 계속되어 투입되는 일본 정규군과 전면전으로 맞붙기 어려워 후퇴했고 이는 경신참변의 원인이 되었다. 독립군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해 주던 만주 지역 조선인을 일본군이 대량 학살하였는데 일본은 증거 은폐를 위해 동아일보 기자마저 암살하는 치졸한 짓을 저질렀다. 그러나 어찌 손바닥으로 하늘이 가려지겠는가? 당시 만주에 있던 서양인 선교사들의 폭로와 주민 증언으로 전모가 밝혀졌으며 최소 1천여명 이상의 조선인들이 학살에 희생된 것으로 보고 있다.
안팎이 이렇게 시끄러웠지만 이 당시 조선총독 사이토는 흔들리지 않고 본인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조선의 공업화를 꾸준히 추진하고, 산미증식계획을 실천해 쌀을 일본으로 실어 보냈다. 그리고 조선사 편수회를 만들어 조선사를 자기들 입맛에 맞게 편집할 준비를 하는 한편, 친일 지식인들을 적극 양산했다. 무단통치의 잔재를 없애려는 듯이 교원들까지 칼 차고 수업하던걸 칼 차지 않게 하고, 헌병도 대부분 경찰로 전환했다. 하지만 이미 언급했듯이 경찰이 더 늘어나서 조선민중 억압하는건 똑같았고, 일제 치하에 저항해 독립운동 하던 사람들이 검거될 경우 강경 탄압하고 처형하는 것도 바뀌지 않았다.
일본의 혼을 심는다고 신사를 무더기로 세우던 것도 이때다. 지금의 남산 식물원 자리에는 아예 조선신궁을 크게 세워 경성 한복판에 일본 귀신을 섬기는 곳을 만들었다.
1927년 제네바 해군 군축조약의 전권대표로 지명되면서 사이토는 총독직에서 사임하고, 육군대장 야마나시 한조가 차기 조선총독으로 한반도에 건너왔다.
그런데 이 양반은 별명이 하나 있었다. 바로 '배금(金)장군' 혹은 '금권장군' 이라 불릴 정도로 뇌물을 너무 좋아했다. 상명하복이 제일 칼같이 지켜지는 군대에서 상관에게 그런 별명을 붙이며 놀릴정도였으니 이 자가 얼마나 돈에 환장한 사람이었는지 알 수 있다. 결국 조선에 건너와서도 그 버릇못 고치고 금품수수하다 1928년 쇼와 일왕의 장인이 대만에서 조선인(조명하 의사)에게 암살당할뻔한 일이 발생해 정치적 위기에 몰렸다. 거기다 총독의 측근이 미곡상에게서 5만엔이라는 엄청난
뇌물을 받아먹고 적발되는 바람에 결국 총독임기 채 2년도 못 채우고 1929년 8월에 사임했다.
물론 뇌물을 본인이 받지 않았다고 주장했지만 측근이 그 큰 돈을 혼자 먹겠는가? 이런 사실을 다알고 있었기에 야마나시는 일본으로 귀환하고 나서도 어떤 공직도 맡지 못한 채 늙어 죽을때까지 집에서 칩거해야 했다(뇌물수수로 재판까지 갔는데 판결은 무죄).
이 때는 일제가 1930년대 말~패망할때처럼 전쟁에 미치지 않을 때였다. 1차대전의 승전국으로 채무국에서 채권국으로 바뀌었고, 투자금이 한반도에 유입되면서 3%이상의 꾸준한 경제성장 그리고 공업화가 이뤄졌다. 하지만 이 경제발전은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었다. 다 같이 잘 먹고 잘 살기 위한 성장이 아닌 조선을 일본의 원료공급지이자 상품 팔 시장으로 키우기 위한 성장이었기 때문에 구조 자체가 기형적일 수밖에 없었다. 일본은 한반도에 뽕나무를 심고, 목화를쳐 섬유를 얻은 뒤 일본으로 가져가 비단, 광목으로 가공한 다음 조선 혹은 다른나라에 다시 비싸게 팔았다. 섬유를 뽑고, 원료를 생산하는 저부가가치 노동은 전부 조선인들이 했으며 핵심 기술은 일본인들끼리만 공유했다. 일본이 살쪄가면 갈수록 조선은 피폐해졌다.
일제는 조선인의 교육도 통제했다. 보통학교는 그래도 많이 설립되었으나, 중등/고등 교육을 받을 기회는 철저히 제한했다. 2천만명이 넘는 사람이 사는 한반도에 대학이라고는 딱 하나 경성제국대학(1924년 개교)밖에 없었다. 그나마 법학(법학과 문학부로 나눠짐)과 의학부밖에 없었고 이공학부는 14년 뒤에나 개설되어 조선인들이 기술 익히는걸 경계했다. 그나마 학교 정원의 3분의 2가량은 일본인들로 받았으며 나머지 3분의 1정도만 조선인이었다. 또한 조선인이 일본으로 유학 오는것도 그리 달가워하지 않았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일본은 승전국이 되고, 채무국에서 채권국으로 바뀌었다. 이 때 일본 군부의 대외 시각도 많이 바뀌었다. 1910년대만 해도 제1의 주적은 제정 러시아 (그 후 소련)이었으나, 1920년대 되면서부터는 주적을 태평양을 마주보고 있는 강대국 미국으로 보는 시각이 군부 내에서 점점 퍼져갔다. 일본은 한반도만으로 만족할 생각은 꿈에도 없었다. 만주로 진출하고자 하는건 군부의 목표였는데, 미국은 러일전쟁에서 일본을 용병으로 잘 쓴 뒤로는 일본의 더 이상의 대외진출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특히 일본 해군의 무차별적인 전함 건조를 경계했다. 영국도 마찬가지로, 일본의 1차 대전시 행동을 보고 영일동맹을 더 이상 연장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일본 정부도 해군이 국가 예산을 30%나 잡아먹는 등 너무 비대해지자, 해군을 누를 필요성이생겨 워싱턴에서 열리는 군축조약 협상에 적극적으로 나왔다. 해군이 해달라는 대로 다 해주면 나라가 먼저 망할 지경이 되었기 때문이다.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은 1922년에 체결되었는데 중요한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 1921년 11월부터 모든 주력함의 신규 건조는 10년간 중단한다.
- 미국, 영국, 일본, 프랑스, 이탈리아의 주력함 및 항공모함의 보유비율은 미국 5 영국 5 일본 3 프랑스와 이탈리아는 각각 1.75로 한다.
- 폐기하는 군함을 타국이 이용할 수 없게 해야 한다.
- 미국, 일본, 영국은 조약상 명시한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 태평양 지역에서 해군기지 및 요새를 현 상황 그대로 유지해야 한다.
일본 해군은 주력함 비율이 최소한 미국의 7할은 되어야 한다면서 반대했다. 거기다 조약을 준수해야 한다는 조약파와 군축조약 탈퇴를 주장하는(실제로 일본은 1934년 탈퇴함) 함대파로 나눠지면서 안 그래도 복잡한 군부 내 파벌이 더 어지러워졌다. 그러면서 일본 해군은 조약의 헛점을 이용 작은 구축함에 큰 포를 탑재하거나 처음부터 작은 포를 탑재한 군함을 건조한 다음 나중에 포를 대구경 포로 바꿔끼는 꼼수를 선보였다(그러면서 배수량도 속였다).
간토 대지진 등의 큰 사건이 있었지만, 그래도 1930~40년대에 비하면 그나마 이 때 일본은 정상이었다. 조선의 독립운동은 점점 불기가 사그라들어 갔고, 문화통치로 인해 자생적 친일파들이 많이 생겨나면서 1920년대 후반 조선총독부의 통치도 비교적 안정적으로 굴러갔다.
그러나 식민지의 한계는 명확했다. 많은 조선 사람들이 살길을 찾아 만주로 떠나야 했고 빈부 격차도 극심했다. 소수의 지주는 자가용을 타지 않으면 본인의 땅을 하루에 다 돌아볼수 없을 정도로 부자였지만 소작농들은 지세와 비료, 각종 잡비를 내고나면 남는게 없었다.
물론 지주들은 대다수가 일본에 협조적이었기에 관청이나 경찰은 지주의 편만 들었다.
산미증식계획은 쉼없이 추진되었고, 겉으로 보기에는 공업시설도 크게 확충되었지만 알맹이는 모두 일본인들이 차지한 상태가 계속 이어졌다.
야마나시 한조 총독이 의옥사건으로 물러나자 문화통치로 유명한 사이토 마코토가 다시 조선총독으로 돌아왔다(1929년 8월). 그는 두 번이나 총독을 역임했고 역대 조선 총독 중 가장 재임기간이 길었던 인물이다. 거의 10년 세월을 조선의 사실상 왕으로 군림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