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에 주둔하던 미군 항공대가 일본군의 공습으로 궤멸을 당한 뒤인 1941년 12월 22일, 일본 측 지상군은 필리핀 루손 섬의 링가옌 만에 상륙했다. 38대의 95식 경전차를 갖춘 제4 전차연대와 34대의 89식 전차와 14대의 95식 경전차, 2대의 97식 전차를 갖춘 제7 전차연대를 휘하에 둔 이들은 곧 필리핀의 수도인 마닐라로 진격했다.
필리핀에는 M3 경전차로 무장한 2개의 미군 전차대대가 있었다. 일본군에는 화력과 방어력 등의 면에서 M3 전차에 맞설만한 전차가 없었다(심지어 엔진의 출력면에서도 그랬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미군은 싸울 준비를 하지 못한 상태였으며, 전쟁이 갑자기 벌어진 탓에 혼란에 빠져있었다. 미군도 전차를 동원한 반격을 시도했으나, 일본군을 막을 수는 없었다.
마닐라를 포기한 미군은 바탄 반도로 후퇴했다. 정글로 뒤덮인 바탄 반도에서는 전차가 활약할 수 없었기에 일본군 포병대가 더욱 결정적인 역할을 맡았다. 일본군은 바탄 반도 일대에 대규모 포병 전력을 전개했고, 미군을 강력하게 타격했다. 1942년 4월, 바탄 반도의 미군은 항복했다.
필리핀에서 미군 최후의 저항 거점은 바탄 반도 근처의 코레히도르 섬의 요새였다. 일본군 포병대와 폭격기들은 코레히도르 섬의 요새를 한 달간 공략했다. 이로써 코레히도르 섬 요새의 해안포 전부가 파괴당했다. 1942년 5월 5일, 일본 육군이 코레히도르 섬을 공격하는 와중에 3대의 97식 전차와 1대의 M3 경전차(노획품)를 코레히도르 섬에 상륙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 당시 일본군은 더욱 강력한 포를 장착한 개량형 97식 전차(치하改[개])의 양산을 막 시작했기에 그중 몇 대를 사용할 수는 있었다. 일본군은 M3 경전차와 싸운 뒤 치하改 전차를 필리핀에 긴급히 보내주었다. 이로써 필리핀 전투는 치하改 전차의 첫 전투가 된 것이다.
일본군 전차의 등장은 코레히도르 섬의 미군들을 공포에 빠뜨렸다. 결국 코레히도르 섬을 지키던 미군 지휘관 조나단 웨인라이트 장군은 저항을 포기하고 항복했다. 1942년 5월 6일의 일이었다.
코레히도르 섬에서의 개량형 97식 전차(치하改)
M3 경전차
89식 전차
95식 경전차
97식 전차
치하改[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