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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사회.정치.역사.인물

5공화국 인권 유린 '부천 경찰서 성고문 사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부림사건, 깃발사건 등과 더불어 5공화국 시기에 일어났던 인권 유린 사건

1986년 6월 5일에 발생하여, 1988년에 이르러서야 해결된 국가 폭력 중 하나. 흔히들 부천서 성고문 사건, 심지어 당시에는 성고문이라는 표현도 제외하고 "부천서 사건", 또는 "부천서 권 양 사건" 등으로 에둘러서 표현되었던 사건이다.

이 사건은 부천경찰서가 1982년 개청된 이래 4년 만에 있었던 흑역사였으며, 부천시에는 1981년 이전까지만 해도 부평경찰서를 통해 치안을 담당하게 되었으나 행정구역의 불일치, 비대한 관할 구역 문제 등으로 인해 부평경찰서를 당시 북구 일대(서구와 계양구 포함)로 축소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건의 배경

1986년 5월 3일, 인천에서 일어난 대규모 민주화 시위는 대대적인 공안 탄압을 가져오게 된다. 시위가 격렬해지면서 야당인 신한민주당과 재야 운동권 세력 간의 신뢰가 깨진 것이었다. 깨진 신뢰의 틈을 비집고 전두환 정부는 재야 운동권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에 들어갔고, 사건이 일어난 인천 지역의 노동자 단체에 대한 탄압은 그 중 가장 심했다.



당시 인천 지역에는 대학을 중도에 그만두고 노동운동에 투신한 소위 '학출' 들이 많은 곳이었는데 ,이 과정에서 이런 학출들이 대대적으로 체포되었다. 학출들은 학력이 너무 높다는 이유로 주민등록 그대로는 취업이 되지 않기 때문에 주민등록증을 대부분 위조한 상태였고, 이는 실정법 위반으로 체포되었다. 여기에 5.3 인천항쟁의 지도부 격인 인물들이 모두 도피하면서, 이들을 잡기 위해 수사가 더욱 강도 높게 진행되던 와중이었다.


사건

1986년 5월 21일, 갓 학출이 되어 부천시 지역의 노동 운동에 뛰어든 권인숙이라는 여대생이 있었다. 그녀는 당시 서울대 의류학과 학생이었으며 경기도 부천시에 소재한 (주)성신이란 가스배출기 제조업체에 '허명숙'이란 가명으로 위장 취업했다.

5.3 인천항쟁으로 인해 탄압이 격렬해지던 1986년 6월 4일 밤, 권인숙은 그녀의 정체를 의심한 통장의 신고로 자취하던 아파트에서 체포되었다. 조사 도중 권인숙이 주민등록증을 위조한 사실이 드러났고, 여기에 당시 수배 중이던 양승조를 비롯한 고위 지도층의 소재 또한 추궁받았다. 권인숙은 5일까지 수사를 받았고, 6일 새벽에 경찰서 상황실로 다시 끌려나갔다. 그녀가 자백을 하지 않자 경찰서장이 분노했고, 당시 상황실장이던 문귀동 경장에게 수사를 지시하면서 사건이 벌어졌다.

이렇게 끌려 온 그녀는 문 경장에게 6월 6일과 7일 2차례에 걸쳐 성고문을 당했다.

6월 16일부터 인천소년교도소로 이감된 권인숙은, 처음에는 자살충동도 일었지만 곧 이와 같은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맞서기로 결심한다. 그녀의 고문 소식이 알려지며서 교도소 내 양심수들이 연대 단식을 했고, 그녀도 몸을 추스린 후 6월 28일부터 단식에 돌입했다. 이어 그녀는 7월 3일부터 문귀동을 강제추행 혐의로 인천지검에 고소하며 진상규명을 요구했다. 그러나 그날 권인숙은 공문서변조 및 동행사, 사문서변조 및 동행사, 절도, 문서파손 등의 혐의로 구속 기소되었다. 가해자인 문귀동은 권인숙을 명예훼손 혐의로 인천지검에 고발했다. 

그녀의 변호인단 9명이 7월 5일에 문귀동 경장과 옥봉환 부천경찰서장 등 관련 경찰관 6명을 상대로 독직폭행 및 가혹행위 혐의로 고발장을 제출하고, 문 경장이 무고 혐의로 맞고소하면서 사건이 널리 알려졌다.




재판 과정
권인숙의 고발에 대해, 검찰의 경우 처음에는 김경회 인천지검장이 사법고시 동기이자 민주정의당 노태우 대표의 친인척인 박철언 국가안전기획부장 특별보좌관의 격려로 성실히 수사하였다. 그러나 관계기관대책회의에 참석한 서동권 검찰총장이 돌연 축소 수사를 지시하여 축소 수사를 하고, 7월 16일에 검찰은 "사건 당시 성모욕 행위는 없었다"고 공식 발표를 하는 동시에 성고문을 한 문귀동을 기소유예처분한다. 그러면서 그녀에게 한 저 유명한 말. "급진 좌경사상에 의한 노학연계투쟁을 전개했던 권양의 '성적모욕' 의 허위사실 유포는 운동권이 성마저도 혁명의 도구로 쓴다는 증거다". 한 마디로 '이게 다 좌파놈들의 계획적인 수작이다. 네가 잘못한 거다, 네년이 더럽다' 라는 소리다. 

그러나 이때 이미 검찰은 진실을 알고 있었다. 문귀동을 조사해서 그가 실제로 성고문을 가했음을 확인한 것. 정권의 안위를 위해 검찰은 진실을 묻어버리기로 결정했다.

이러한 적반하장의 처리에 여론이 분노하여 7월 19일에 신한민주당, 민주화추진협의회,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 그 외 여성단체와 종교단체 등이 모여 '성고문/용공조작 범국민폭로대회'를 열었지만 경찰에 의해 원천 봉쇄되었고, 검찰의 수사 결과는 바뀌지 않았다. 9월 1일에 199명의 변호인단은 인천지검에 재정신청을 냈지만 기각되었고, 11월 21일에 권인숙은 징역 3년을 구형받았다. 

이후 이 사건은 고등법원과 대법원을 거치며 계속 치일피일 미뤄졌다가, 1987년 4월에 권인숙 본인과 변호인단이 대법원에 상고 포기서를 제출하자, 권인숙은 결국 1년 6개월의 징역을 선고받았다. 

언론의 왜곡보도
사건 당시 전두환 정권은 "운동권이 마침내 성까지 혁명의 도구화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역공을 가하며 언론에겐 보도지침을 통해 '부천서 성폭행 사건'이라 하지 말고 '부천서 사건'이라 쓸 것을 강요하였다. 이런 보도지침은 당시 국가안전기획부장이었던 장세동이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사건은 전두환 정권은 물론이요, 언론의 부도덕성을 유감없이 드러내 준 사건이었다. 언론은 인권단체와 시민단체들의 간곡한 요청을 외면하고, 검찰에서 배포한 보도자료와 정권의 보도지침에 따라 앵무새마냥 읊을 것을 강요했다.

특히 이 사건 당시 조선일보의 활약은 두각을 드러냈다. 조선일보는 7월 17일자 사회면 메인 기사에서 <「성적모욕」없고 폭언-폭행만 했다>는 검찰의 발표문을 제하로 뽑아 검찰의 주장을 기정 사실화했다. 거기에 "운동권, 공권력 무력화 책동"이란 터무니없는 제목까지 달았다. 또한 <「부천서사건」 공안당국 분석>이란 제하의 기사에서도 "급진세력의 투쟁전략/전술 일환", "혁명 위해 '성'까지 도구화한 사건"이라는 검찰 발표 내용을 제하로 뽑아 피해자인 권인숙의 인권을 철저히 유린했다. 나아가 7월 18일자 사설 <「부천사건」에서 얻는 것>에서 "이 시점에서 수사권 밖의 진실이 어떠했는가를 가릴 능력도 없고 그럴 입장도 못 된다."고 주장했다.


당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 보고서는, 조선일보의 성고문 보도를 왜곡보도의 대표적 사례로 꼽았다. 당시 보고서를 읽은 조선일보 기자들은 표현하기 어려운 부끄러움을 느꼈지만, 해당 신문 제작 책임자 선에서는 "이 보고서는 (조선일보에 대한 반감이 뿌리깊은) 동아일보 해직자들 작품이다"는 엉뚱한 반응을 내놓았다. 이것보다 더 충격적인 얘기도 있는데, 1987년 7월 18일 조선일보 사회부 평기자들이 쓴 <조선일보 편집에 관한 의견서>에 따르면 사건 당시 편집국 내에선 "어떻게 다 큰 처녀가 자기가 (성폭력을) 당했다는 사실을 남에게 내세울 수 있느냐, 보호해 줄 가치가 없다"는 얘기가 오갔다고 한다.

또 언론사의 사회부장 이상 간부들은 7월 16일 부천서 성고문 사건에 대한 검찰 수사발표를 전후해 문공부 고위 관료의 인솔 하에 '간담회' 명목으로 부산, 도고온천 등에 놀러가 해당 사건의 보도에 대한 협조의 대가로 정부 당국이 준 거액의 촌지를 받아 챙겼다. 또한 법원 출입기자들도 검찰 발표 당일 인천지검 출발 전에 법원 기자실에 들른 법무부 고위 당국자로부터 거액의 촌지가 든 두툼한 봉투를 나누어 받았다.

반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6월 항쟁은 거짓의 역사를 끝냈다. 변호인단이 1988년 1월에 '재정신청 조속 처리 촉구서한'을 대법원에 내자, 상황이 완전히 바뀌면서 차일피일 미루던 재정신청을 법원이 전격 수용하여 2월 9일 대법원에서 재정신청을 수용했다. 1989년 문귀동은 징역 5년의 형과 위자료 지급을 선고받고 감옥으로 직행했다. 이때 처음으로 특별검사가 임명되어 이 사건을 맡았다. 반면 권인숙은 6.29 선언 직후인 1987년 7월 8일에 양심수 석방을 요구하는 여론에 따라 가석방되었다.

이후 권인숙은 명지대학교 교수가 되었고, '한국성폭력상담소'의 부설 연구소인 '울림'의 초대 소장을 지냈고, 2004년에는 군대 내 성폭력 문제에 대한 실태 조사를 하는 등, 권력과 폭력의 관계를 깊게 연구해왔다고 전한다. 그리고 2017년 3월 8일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전 대표의 대선 캠프에도 합류하였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에는 법무부 성희롱·성범죄대책위원회 위원장에 임명되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민족모순'이 먼저냐, '계급모순'이 먼저냐로 분열돼 있던 민중운동 계열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당시 정치투쟁에 가려져 있던 여성운동권 역시 페미니즘 담론에 관심을 가지는 큰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