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자흐스탄에 있던 홍범도 장군 유해 봉환에 북한 발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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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자흐스탄에 있던 홍범도 장군 유해 봉환에 북한 발끈!


2021. 8. 16.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자 공산주의자 의병장 홍범도 장군.


1868년] 평양 서문내에 위치한 무열사 앞마을의 양반집에서 머슴살이하던 아버지에게서 태어나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홍범도가 태어나자마자 어머니가 출산 후유증으로 사망했고 머슴살이하던 아버지마저 그가 9살이 되는 해에 세상을 떠난다.

이것 때문에 당시에 어린 홍범도는 자신의 뿌리조차 모른 채 다른 양반집에 머슴으로 보내졌다. 10대 중반이던 1883년 머슴살이를 청산하고 인생을 바꿔보고 싶다는 마음에 평양 감영의 나팔수로 입대했으나 얼마 가지 않아 이탈하는데 여러모로 열악했던 군대와 대우에 못 이겨서라는 이야기가 있다. 이후 마음을 달래고자 금강산에 있는 한 절에 불제자로 출가한다.

평생 교육을 못 받았던 홍범도는 이 때서야 절에서 글을 깨치고 우리나라 역사에 대해 배우게 되는데 이순신 장군도 이 때 알았다고 하며 비구니였던 아내도 이 때 알게 되어 나중에 결혼까지 하게 된다. 항일 투쟁 노선 외길을 걸었던 홍범도 개인에게 있어서는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 그 뒤 절을 떠나 황해도로 아내와 거주지를 옮겨 한동안 제지소에서 일했으나 1886년 3년치 임금을 체불한 고용주를 말다툼 끝에 살해하고 도주해 강원도 북부 산악 지대에서 사슴, 노루, 멧돼지 등 짐승들을 사냥하였던 산포수 생활을 했으며 1895년 을미의병 발생 시기까지 10년 동안 평범한 사냥꾼으로 생활했다.

총을 잘 쏘기로 유명해서 일대 포수들에게 지지를 얻고 '포계(砲契)'라는 포수 권익 단체를 만들고 대장이 된다.

1895년 을미의병 발생 직후 강원도 회양에서 김수협과 의병을 일으켰는데 이유는 일제의 총포기화류 일제 단속법이 발령됐기 때문. 사냥을 그만두었을 때도 '이 총으로 짐승이 아닌 왜놈들을 사냥하겠다'는 다짐으로 구국 운동을 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포수 시절에 갈고 닦은 사격술로 일본군과 맞서 싸우게 되었다. 포수로 생계를 책임지던 홍범도와 조합원들에게 있어서 의병 투쟁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당시 의병은 14명으로 전해지며 대부분 함께 사냥 일을 하던 강원도 산포수들이었다.

이 시절의 그는 말 그대로 전설의 스나이퍼인데 동료들을 먼저 가라고 한 뒤에 홀로 경기도와 강원 지방, 관북 지방을 연결하는 철령에서 매복하여 일본군 10여 명을 사살했다. 야사에 따르면 '수십 명을 쏴 죽이고 돌아왔다'는 말도 존재한다. 북상하던 유인석의 의병대와 연계하여 일본군과 3차례의 전투에 들어갔으나 1896년 이후 을미의병의 기세가 사그러지자 홍범도 역시 의병을 해체하고 귀향해 다시 산에서 포수 생활을 시작했다.

1905년 대한제국의 을사늑약 체결 시점에서는 딱히 의병 활동을 하지 않았으나 1907년 고종 강제 퇴위와 군대 해산을 전후한 시기에 정미의병이 시작되고 일제가 국내 포수들을 대상으로 총포 및 화약류 단속령에 따라 강제 총기 수거령으로 생계까지 막막해지자 함경도 갑산 일대의 포수들을 모아 다시 궐기한다. 홍범도는 최대 600명~700명으로 생각되는 의병대를 이끌고 주로 함경도와 강원도 북부를 무대로 하는 유격전을 벌였다. 말이 무대지 사실상 산 속 수백 리를 축지법급으로 숨어다녔다는 이야기가 되며 이 때 민중에서는 '나는 홍범도'라는 별명까지 붙는다. 이 시기 일본 헌병대 및 육군 정규 부대를 상대로 크고 작은 37회의 전투를 벌였다고 알려져 있다. 1908년 4월 일제에 붙잡힌 아내 이옥구(이옥녀)가 모진 고문으로 옥사하였고 1달 후 장남 홍양순도 정평배기 전투에서 아버지와 함께 싸우다가 전사했으며 차남 홍용환도 아버지와 함께 연해주로 이주하여 의병 활동을 하다 결핵으로 병사하고 말았다.

1910년 결국 대한 제국이 일본에 병합되면서 의병 항쟁 여건은 지속적으로 악화되어 왔으며 이 시기 국내 무장 독립 투쟁 단체들의 일반적인 조류에 따라 홍범도 역시 1911년 연해주로 망명했고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점으로 하는 독립운동 단체와 연계해서 수시로 월경해 접경 지대의 친일파 및 일본 군경을 괴롭히는 유격전을 수행했다. 홍범도가 훗날 공산주의 독립운동 단체와 인연을 맺게 된 것도 블라디보스토크에서였다. 1917년 10월 혁명 이후 러시아 혁명의 저지를 위해 국제 간섭군이 러시아에 진주(시베리아 내전)할 때 일본군이 연해주에 진주했는데 일본군은 이 기회를 틈타 홍범도를 포함한 연해주 소재 조선 무장 독립운동 단체를 소탕하려 했다. 이에 대응해 조선 무장 독립운동 단체도 적극적인 교전을 벌임과 동시에 그나마 자신들 편이라고 생각되던 적위군과 손을 잡게 되었는데 홍범도와 공산당의 첫 만남이었다. 이후 함경북도로 수 차례 진출해 1919년 10월 혜산진 일대에서의 유격전 성과로 지명도를 높인 홍범도는 1920년 봉오동 일대에서 무장 독립운동 단체들이 연합해서 결성한 대한북로군독부 예하 북로 제1군 사령부장(부사령관)으로 선출되었다.

1920년 6월 봉오동 전투를 치르고 그로부터 4개월 뒤 청산리 전투에 참여해 활약을 했다. 청산리 전투의 주도적인 인물로 알려진 김좌진이 우파 인사이고 말년에 현지 한인들에게 인심을 잃었던 탓에 중국 내 한인 사회에서는 청산리 전투의 주요 지휘관으로 김좌진보다 홍범도를 더욱 높게 친다. 거꾸로 국내에서는 홍범도가 결국 소련군과 손을 잡았었다는 점 때문에 1980년대 후반까지도 홍범도 이야기가 거의 나오지 않거나 간단하게 언급만 되고 홍범도의 말년도 '독립운동을 하시다 아무도 모르게 쓸쓸히 돌아가셨다' 정도로만 언급되었다. 사실은 김좌진과 홍범도 부대의 공로가 반반이라고 보는 편이 좋으며 특히 일본군끼리 서로 싸우게 한 작전은 홍범도가 주도했다. 그러나 이후 계속된 일본군의 토벌전 및 만주 군벌과의 충돌로 인해 부득이하게 홍범도를 포함한 독립군 세력은 소련 영내로 탈출할 수밖에 없었다.

1921년 연해주 및 시베리아로 후퇴한 독립군은 결국 소련의 지원을 받기 위해 자유시로 이동했으며 이 시기 홍범도는 그간의 무훈으로 새로 창설된 대한독립군단 부총재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곳에서 홍범도는 독립군 내 공산당 파벌 싸움으로 발생한 자유시 참변을 목격하게 되지만 홍범도 측 부대의 사상자는 1명도 없었다. 이후 1922년 일본의 연해주 간섭군 철수를 조건으로 일본이 요구한 항일 무장 투쟁 단체의 해산이 이루어지고 나서 결국 홍범도 이하 공산당측 독립군은 무장 해제되었다. 다른 동료들은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가거나 다른 지방으로 흩어졌는데 돌아갈 곳도 가족도 없던 홍범도는 결국 러시아에 남아 소련 시민으로서의 삶을 시작해야만 하게 되었으며, 이 때 2번째 부인과 재혼하게 된다.

1922년 2월 모스크바에서 코민테른의 주최로 열린 극동민족대회(극동피압박인민대회 혹은 원동약소민족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모스크바에 갔는데 레닌이 트로츠키를 통해 홍범도를 따로 불러 단독 면담을 한 다음 금화와 홍범도라는 이름이 새겨진 은제 마우저 C96을 선물해주었다. 독립군 중 트로츠키나 레닌과 단독 면담을 한 것은 홍범도가 유일하며 이 때 레닌에게 받은 권총은 현존하지 않지만 권총집은 지금도 현존한다. 





홍범도는 그간의 무훈으로 얻은 인망에 힘입어 1923년 연해주 남부에서 한인 콜호즈의 지도자가 되었고 1927년 소련 공산당에 정식으로 입당했다. 이후 연해주의 고려인 지도자 중 1명으로서 지속적으로 활동했으나 1937년 스탈린에 의해 이뤄진 고려인 강제 이주로 인해 당시 소련 영토였던 현재의 카자흐스탄으로 강제 이주되었다. 이후 고려인 극장에서 고려인 희곡 작가 태장춘의 배려로 수위장을 맡았고 연금을 받으며 생활하였는데 홍범도는 매월 80루블의 연금과 50루블의 보수를 받아 넉넉하게 생활할 수 있었다. 태장춘의 아내 리함덕에게 독립운동가로서의 활약상을 구술하고 이를 바탕으로 <홍범도 일지>가 만들어졌으며 홍범도 일지를 토대로 한 연극 '홍범도'가 고려극장에서 상영되는데 이를 관람한 홍범도는 자신을 너무 추켜세웠다며 계면쩍어했다고 한다. 홍범도가 맡은 직책인 수위장도 고려극장의 배려로 얻은 것이기 때문에 일은 널널하였다. 홍범도는 고려극장의 제일 뒷편에 앉아 당시 인기리에 상영 중이던 연극인 “춘향전”, “심청전” 등을 관람하고 주연 배우들과 담소를 나누었다고 한다.

1941년 6월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이후에는 물자를 아껴 전선의 병사들을 돕자는 선전 활동을 하기도 하였고 <레닌기치>를 읽으며 이웃들에게 전선 소식을 전하거나 직접 글을 투고하여 젊은이들에게 참전을 독려하기도 하였다. 1942년 4월 홍범도가 몸담고 있던 조선극장이 우스또베로 옮겨간 이후에는 정미소 노동자로 일하다가 1943년 10월 25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2019년 4월 문재인 대통령의 카자흐스탄 국빈 방문을 계기로 유해 송환을 추진하였고, 2020년 홍범도 장군의 유해를 토카예프 카자흐스탄 대통령의 국빈 방한길에 이장할 예정이었다가 코로나19 확산으로 1년이 미루어, 2021년에 이장되었다. 북한은 유해를 당연히 고향인 평양으로 모셔와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게 막는 일은 반인륜적인 도발 행위라며 대한민국을 비난했다.



2021년 8월 12일, 청와대는 이번 토카예프 대통령의 방한과 연계하여 카자흐스탄 크즐로르다에 안장되어 있는 홍범도 장군의 유해를 모셔올 예정이라고 밝혔다. 문재인 대통령은 유해 봉환을 위해 8월 14일, 황기철 국가보훈처장을 특사로 하는 특사단을 카자흐스탄에 파견한다. 15일 광복절 저녁 최고의 예우 속에 대한민국에 도착하는 홍범도 장군의 유해는 16일과 17일 양일간 국민 추모 기간을 거친 후, 18일 대전현충원에 안장될 예정이다. 건국훈장 대한민국장도 추서되어 여운형 선생에 이어 두 번째 대한민국장, 대통령장 중복 수훈자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A330 MRTT 1호기가 사용된다. 기사 홍범도 장군의 유해를 봉환하는 A330 MRTT를 호위하기 위해 F-15K, F-4E, F-35A, F-5F, KF-16D, FA-50 등 대한민국 공군이 운영하는 모든 종류의 전투기가 출격해 귀국길을 에스코트했다.



2021년 8월 15일의 늦은 밤, 마침내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대한민국에 도착했다. 이번 이장을 계기로 문재인 대통령은 홍범도 장군에게 건국훈장 최고등급인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