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귀양가고 얼마 안 돼 조말생은 바로 사면됐고 고향집에서 2년을 쉬었다. 세종은 1430년에 다시 직첩을 돌려줬다. 대간들은 가만있지 않았다. 언관들이 궁 앞에 멍석을 깔고 전원 사직 시위를 벌였다. 결국 세종은 신하들과 끝없이 평행선을 달리는 논쟁을 계속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권도로 행하겠다"(내 마음대로 하겠다)며 권도, 즉 왕도정치가 아니라 패도정치를 하겠다는 의미의 말까지 하며 신하들의 뜻을 꺾어버렸고, 1432년 조말생은 동지중추원사로 복귀할 수 있었다. 이미 그의 나이 63세였다.
나이가 들어서 지속적으로 세종에게 사직하겠다는 청을 올렸으나 세종은 이 또한 들어주지 않았다.
사직 상소를 끈질기게 올렸지만 전부 거절당하고 1447년 4월에 사망했다. 향년 78세. 능력이 있다고 판단한 신하는 나이가 들어 죽을 때까지도 중용하는 세종의 인사 방식을 보여주는 사례. 문강공이라는 시호를 받았는데 문(文)은 학문에 부지런함을 뜻하고 강(剛)은 지난 오점을 고친 것을 뜻하는 의미로 내린 시호라고 한다. 실록에서는 기개 있고 도량이 크며 일처리 방식이 너그럽고 후덕했지만 뇌물 사건의 오점이 상당히 커서 정승이 되지는 못했다는 평을 남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