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병은 일제시대엔 학병으로 불려나가기도 했고 해방 후 얼마안가 벌어진 6.25 전쟁에서 학생들이 자진해 학도병을 자진했으며, 이후 전황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반강제로 징집하기도 했으며, 이들에게 전차 운용을 맡기기도 했다.
게다가 훈련소에서 정식으로 등록받는 소년병과 달리 학도병은 현지에서 급조로 훈련받고 투입되기에 대개 군복과 군번을 부여받지 못했다. 국방부 추산으로는 2573명이며, 소년병 전우회장이 개인적으로 추산한 자료에 따르면 3260명이 확인된다. 전우회장의 말에 따르면 3만 명이 소년병으로 참전했고 3천 명이 전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현충원 등지에서 추모비도 볼 수가 없는데, 국방부 입장에서는 떳떳하지 못한 역사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참전 기록도 없는 이들은 전후 다시 군대에 징집되기도 했다.
물론 당시 한국 병역법에서도 18세 미만의 청소년을 징집할 법적 근거는 없었지만, 반대로 18세 미만의 징집을 금지, 제한하는 법적 근거 또한 없었기 때문에 소년병이 존재했던 것이다.
학도병의 수행 임무는 어디까지나 후방 병참 지원이었다. 전황이 너무 불리하니까 어쩔 수 없이 전투에 투입된 것. 그 중에도 강제징집 당했다거나 전쟁 끝나고 기록이 없다며 다시 군대 가야 했다는 등 안 좋은 이야기도 존재한다. 하지만 개중에는 자원해서 전투에 투입된 경우도 있었는데 이들은 국가와 가족, 친구들을 지키기 위해 왕성한 전투의지를 보였다.
한국에서는 1990년대 말부터 6.25 전쟁 당시 소년병으로 참전한 사람들의 정신적인 후유증이나 사회 부적응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고 있다. 늦었지만 소년병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알 수 있다.
한국전쟁이 끝난 뒤에도 유사시 학생 동원을 대비한 조직인 학도호국단이라는 것이 꽤 오랫동안 조직표상으로나마 남아있었으며, 교련 교육이 90년대까지 정규 교과에 있었고, 7차 교육과정까지도 선택 과목으로 밀려났을 뿐 여전히 존재하였다. 그러나 내신에도 반영이 안되는 데다가 때문에 정규 교과 과정에 편성을 안하니까 누구도 신경을 안 썼다. 또한 공군 소속의 군사학교인 공군항공과학고등학교가 있으며, 2009년부터는 군 특성화 고등학교가 생겼다. 이들 학교는 전원 지원제인데다, 입학 연령도 국제법상 지원자일 경우 소년병으로 간주하지 않는 나이대라 아무런 문제가 없다.
2021년 여성징병제 청원이 16만명을 돌파하는 등 관련 이슈가 또다시 불타기 시작하자, 여성을 징병하는 대신 남자 중고생 소년병 징집을 하라는 맞불성 청와대 청원이 등장했다. 하지만 청원 동의 정족수를 다 채우더라도 실제로 이뤄지기는 커녕 진지하게 논의될 가능성따윈 전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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