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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우' 독립운동가의 58년만에 복수

"고문을 당하는 것보다 더 끔찍한 일은 내가 고문당할 순서를 기다리는 것과 다른 이가 고문 당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였다."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2000년 국민의 정부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授與)받았다.


1942년 5월 부산에서 6명의 부산진공립보통학교(現. 부산진초등학교) 동창생들이 비밀결사조직인 '친우회'를 결성하였다. 1943년 3월, 누군가의 밀고에 의해 친우회 총책 이광우와 부총책 정종기, 조직원 김수복 등 3명은 항일투쟁을 위한 군자금 조달과 일본 군사시설 파괴모의 혐의로 경남경찰부(현 경남경찰청) 고등과 외사계에 '친우회 불온전단사건'으로 체포되었다.

당시 울산공산당사건(울산ML연맹)으로 체포된 여경수, 이미동 등의 여러 청년들이 같은 시기에 체포된 까닭에 일제경찰은 두 사건을 병합하여 규모를 크게 부풀리기 위한 사건조작을 기획하고 고문을 자행했다. 악랄한 고문으로 인해 여경수는 옥사했고 일제경찰의 사건조작은 실패하였다. 이로 인해 친우회 총책 이광우를 제외한 나머지 검거자들은 모두 석방되었다.

그 후 이광우는 부산지방법원에서 징역 단기 1년, 장기 3년형을 언도 받고 옥고 2년 5개월을 치루고 김천소년형무소에서 해방을 맞아 가석방되었다.

이때 친일 경찰 '고문귀' 하판락이 자신과 같이 유치장에 수감된 동지들을 고문하는 모습을 코앞에서 보았으며, 본인 또한 하판락에게 다리관절 꺽기고문, 고춧가루 물고문 등과 같은 모진 고문을 받았다. 그는 당시에 보았던 잔혹한 광경에 대하여 "고문을 당하는 것보다 더 끔찍한 일은 내가 고문당할 순서를 기다리는 것과 다른 이가 고문 당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해방 이후 그는 평생 하판락을 증오하면서 살았다. 그리고 끝내 이광우의 증언으로 하판락의 악행은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거기서 나온 것이 바로 '착혈 고문'이였다. 마침내 KBS, MBC의 뉴스 및 시사보도 프로그램 등에서 하판락은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이광우는 평생 고문휴유증으로 고생하다가 지병으로 인해 2007년 3월 26일 오전 부산광역시에서 별세하였다. 그의 유해는 2007년 3월 28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