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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사회.정치.역사.인물

극진공수도의 창시자 최배달, 그의 일생 일대기

“나는 싸우는 것이 두렵다. 맞는 것이 두렵고, 지는 것이 두렵다. 싸우다 죽는 것보다 불구나 폐인으로 살아 남을까봐 더욱 두렵다. 그럼에도 나는 매번 새로운 강적을 찾아 나선다.”  -최배달-

 



◆ 한국계 일본인 무도가로 극진공수도의 창시자.

전라북도 김제시 용지면에서 6형제 중 넷째로 태어났고, 태어난 시기가 1920년대 일제강점기인 바람에, 큰 형(최일운)이 일본의 와세다대학에서 공부할 때(전 우석대 총장), 일본에 있는 항공정비학교에 입학했다가 타쿠쇼쿠(拓殖) 대학에 진학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 징집되었다가 일본이 패전한 이듬해 치야코(智弥子)라는 일본인과 결혼한 후에 일본에서 생애 대부분을 보냈다. 이후 무도가로서 성장하여 극진공수도가로 유명해졌는데, 이에 그를 모델로 한 격투만화《공수도 바보 일대》가 창작되고 히트하면서 대중적인 인기를 더하게 된다.



1964년 실전무도를 주창하며 극진회관을 설립, 지금도 일본을 대표하는 무도가 중 한 명으로 자리매김해있다. 극진공수도를 넘어 공수도계 전체의 위상을 끌어올린 사람 중 한명이기도 하다.




 이름

한국에서는 본명인 최영의 대신 최배달(崔倍達)이라는 별칭으로 더 유명하지만, 이는 일본명 오오야마 마스타츠를 한국식 독음으로 읽은 '대산 배달' 의 배달과 원래 한국 성인 최를 합친 것이다. 애당초 한국에선 '배달'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한 적이 없고 귀화 전 이름인 최영의로 활동했다. 그러다 고우영의 대야망에서 최배달이라는 이름을 처음 사용하면서 실제로 한국에선 사용된 적 없는 최+배달이라는 조합이 바람의 파이터 등 다른 작품에까지 영향을 준 듯하다. 바람의 파이터는 최영의를 영웅화하고자 사실과 다르게 묘사한 내용이 상당히 많으므로, 엄밀하게 따지면 '최배달은 최영의를 모델로 한 가상의 인물'이라고 보는 편이 맞을 수도 있다. 물론 후술되어있듯 최배달이라고 불러도 고인의 뜻에 크게 어긋나진 않아보이긴 하지만.

최영의의 일본 이름 오오야마 마스타츠는 본인이 직접 지은 것으로, 특히 마스타츠(倍達)는 고대에 한반도나 한민족을 지칭하는 말로 널리 쓰이는 배달을 한자로 표기할 때 쓰는 '倍達'과 일치한다. 그리고 실제 1985년 최영의 본인의 인터뷰를 보면 알 수 있지만 '배달의 민족' 할 때 그 배달을 뜻하는 것이 맞다. 본인이 고향을 떠나 평생의 반 이상을 외지에서 보냈기 때문에 언제든지 나라와 고향을 생각하는 의미에서 (고향의 대산과) 배달 민족의 배달을 따서 대산 배달이라고 이름을 지었다고 밝혔다.




 어린시절

최영의는 일제강점기 1923년 7월 전라북도 김제군 용지면 와룡리(現 김제시 용지면 와룡리)에서 아버지 최승현과 어머니 김부용 사이 6남 1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부농의 아버지 밑에서 자란 최영의는 어린 시절엔 공부엔 관심이 없고 골목대장을 하는 등의 문제아였다고 한다. 이에 아버지 최승현은 사고뭉치 아들 최영의를 경성의 경성영창(중)학교로 입학시켜버린다.

최영의의 부모는 기독교 신자는 아니었으나 경성영창학교는 서양식 기독교 학교였기에 최영의는 서양식 신식 교육과 서적에 큰 자극을 받게 된다. 이 시절 블레즈 파스칼의 팡세를 읽고 큰 감명을 받아 "힘없는 정의는 무능이고, 정의 없는 힘은 폭력이다." 라는 구절을 평생 수 없이 인용하게 된다. 이 시기에 같은 기독교 단체가 설립한 YMCA의 복싱 클럽에서 복싱을 익혀 대회에서 우승을 했고 보디빌더 와카키 다케마루의 '괴력법'을 읽고 감명 받아 홀로 웨이트 트레이닝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경성영창학교에서마저 퇴학을 당하고 아버지와의 골이 더 깊어진 최영의는 꿈이었던 파일럿이 되기 위해 부친의 반대에도 도망치듯 일본으로 떠난다. 그리고 일본에 가는 배를 타기 위해 들른 부산에서 최영의의 스승이자 친우였던 강유류 가라테의 조영주를 만나게 되고 최영의가 야마나시 소년 항공기술학교에 입학할 때까지 가라테를 지도해주게 된다. 항공학교에 다닐 당시에는 송도관 가라테와 강도관 유도를 배워 각 초단을 사사하고 대동류 합기유술을 수련하기도 한다. 이후 1944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여 학도병으로 차출된다.




 20대

전쟁 후 와세다대학 고등사범부 체육과에 입학하였으나 중퇴하고, 고국에 대한 그리움이 커지는 와중에 당시 그가 의지할 사람은 같은 조선인인 조영주 뿐이었다. 이때 일본의 재일 한국인 사회에서도 이념 갈등이 시작되었고, 민단 소속의 조영주는 최영의를 조총련과의 투쟁의 중심으로 데려간다. 조영주는 최영의를 민단의 청년조직인 재일조선건국촉진청년동맹의 간부, 훈련부장, 건설대대장 등으로 끌어 올렸고, 싸움의 최전선에 있어야 할 최영의에게 조영주는 본격적으로 강유류(剛柔流 고주류) 가라테를 가르친다. 이때 강유류 초대 사범인 야마구치 고겐을 만나 사사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같은 조선인과의 싸움을 통해 실전 가라테의 기반을 쌓게 된 것이다.때문인지 최영의는 이 시절의 이야기를 절대 무용담처럼 늘어놓지 않았는데, 훗날 당시 친교를 쌓은 무도가들의 입을 통해 조금이나마 알려진 행보다.

이 시기 최영의는 길에서 남자의 항문에 경찰봉을 밀어넣는 미군을 때려 눕힌 것을 시작으로 미군과도 잦은 싸움을 벌이곤 했다. 최영의 본인의 증언에 의하면, 전후 당시 미군에 대한 일종의 원한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최영의는 이런저런 싸움이 더해져 일본 경찰의 감시를 받기 시작했고, 곤란에 처한 최영의에게 스승 조영주와 야마구치 고겐은 입산수도를 제안한다. 최영의는 제안을 받아들였고 3년을 목표로 삼고 같은 조영주의 제자인 야시로와 함께 야마나기 현의 미노부 산에서 1차 입산수도를 시작한다. 판잣집에서 각종 수련도구를 가지고 살았는데 소설 미야모토 무사시의 저자 요시카와 에이지가 후원을 해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얼마 못가 야시로는 외로움과 격한 수련을 이기지 못하고 어느 날 밤 사라져버렸고, 시간이 흐를수록 최영의도 회의감에 빠졌으나 조영주가 편지로 그를 격려하였고 하산의 생각을 떨쳐버리기 위해 한쪽 눈썹을 미는 걸 제안하기도 했다. 그렇게 정신이 아득해지는 수련을 계속하던 차 요시카와 에이지가 더 이상 후원할 수 없다는 소식을 전해오고 최영의는 14개월만에 하산하게 된다.

하산 몇개 월 후인 1947년(쇼와22년) 교토에서 개최 된 전후 최초의 전일본공수도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다. 그리고 우승 후 첫 입산수도 당시 약속한 3년을 채우기 위해 1948년 4월 치바 현의 기요즈미 산으로 들어가 1년 8개월간 입산수도를 마치고 내려온다. 이때 최영의는 기존 가라테의 슨도메 룰에 의문을 품고 있었던지라, 가라테 관계자들에게 직접 타격제를 제안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현대 가라테는 무도도 격투기도 아닌 가라테 댄스다.' 같은 발언들로 인해 일부 가라테 유파로부터 이단 취급을 받기 시작했다. 이에 최영의는 일본 각지의 유명 도장들을 찾아가 일명 '도장깨기'를 신청한다. 그리고 최영의에게 패배하고 도장을 그만두는 인원들이 많아지면서 그의 이름이 일본 무도계에서 알려지게 되고 수많은 사람들의 도전이 들어왔다.

그러나 너무나 많은 도전 신청과 무도계의 비난에 난감해 하던 최영의는 영화 쿠오 바디스의 소와 주인공이 싸우는 장면에 영감을 받아 자신의 강함을 증명하기 위해 소를 때려 잡기로 결심한다. 여담으로 이 소 잡은 일화가 원체 유명하다보니 실체 논란이 있기도 한데, 최영의 본인도 후술되어있듯 가족들에게 직접 말했고, 최영의의 제자 겸 만화가 카지와라 잇키가 최영의의 30대 시절 일화를 '사나이의 성좌'에서 그린 적도 있는걸 보면 아예 없던 일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이때 최영의는 사기를 당해 돈이 쪼들려 푼돈이나마 만져보려고 젊은 시절 했던 소 잡는 이벤트를 다시 시도했는데, 소가 도대체 덤비지를 않고 죽어라 도망만 다녀서 대결 자체가 불가능하게 되었고 관객들은 사기라며 돌을 던지고 난리가 났다고 한다. 카지와라는 이때 수모를 당하는 최영의의 낙담한 얼굴을 보면서 안타까움에 '차라리 소뿔에 받혀서 쓰러지기라도 했다면 적어도 저런 모욕은 당하지 않았을 텐데..' 하는 마음까지 들었다고 한다.

따라서 이런 저런 사항을 고려해서 정리하자면, 최영의가 소를 어찌저찌 잡아서 소뿔을 후드려팬건 맞아보이지만, 여느 유명 무술인들의 일화와 마찬가지로 현재로선 영상처럼 확실한 근거 자료가 남아있진 않아 과장이 있을수도 있긴 하다. 다른 관점에서 보자면, 애초에 최영의의 진짜 평가받아야 할 업적은 이런 일화성 이야기의 진위나 사실유무보다는 무술계에 남겨놓은 유산들일 것이다. 최영의를 제대로 평가하려면 당시 가라테 계에서 파격적이었던 풀 컨텍트 방식의 대련체계 도입과 거대 일파 성립, 이를 기반으로 한 인재 배출 등을 평가해야 하는 것이지, 제대로 된 영상 자료 하나도 찾기 힘들었던 시대의 무용담을 신화처럼 떠받드는 것이 아니다.




 30대

해외의 격투기들을 체험한 뒤 다시 일본으로 돌아와 자신의 공수도 도장인 대산도장(大山道場)을 열었지만 이 최초의 도장은 부지 사기사건을 당하며 문을 닫았다. 그전까지는 미국에서 모은 재산으로 꽤 풍족한 생활을 했지만, 사기사건 이후에는 전기도 끊긴 초라한 달동네에서 생활하며 힘든 시절을 겪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명성을 듣고 알음알음 찾아오는 젊은이들 때문에 다시 도장을 열었고, 이때 영문으로 쓴 가라테 기술서 'What is Karate?' 'This is Karate'를 출판했는데 이것이 해외에서 히트를 치면서 경제적으로도 어느 정도 회복하고, 덕분에 일본인 제자들 뿐 아니라 해외에서 온 외국인 제자들까지 모여들면서 도장은 날로 번창했다. 일본에서는 그냥저냥한 수준의 인지도였던 최영의가 오히려 해외에서 먼저 인지도를 얻은 셈. 젊은 시절 미국 등 세계에서 싸우고 다녔던 덕분에 입소문 덕도 좀 보았을 듯하다.

이 당시의 도장 풍경은 변두리의 허름한 도장에 다양한 인종의 덩치들이 우글우글 몰려 거의 싸움 수준의 무지막지한 수련을 하는 살벌하고도 이색적인 모습이었다고 한다.





 40대

1971년 일본의 유명 스포츠 만화가인 카지와라 잇키(梶原一騎)가 원작을 맡은 만화 공수도 바보 일대(空手バカ一代)의 대히트로 최영의는 단순히 격투기 관련 인물만이 아닌 일반 대중들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일본 내에서 초 유명인사가 되어버렸다. 이때 최영의는 상당한 사업 수완을 발휘하여 극진공수를 단순한 무술도장 수준을 넘어서 사실상 거대기업 수준으로 성장시켰고, 최영의의 영향력도 어마어마하게 커지게 되었다. 허나 이렇게 극진공수도가 성장하면서 자연히 이런저런 잡음도 생기게 되는데.. 최영의가 살아있었을 때는 총수로서 강력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으니 큰 문제가 없었지만, 최영의 사후 극진이 파벌 싸움 등으로 분열되는 과정을 보면 이때 잡음을 짐작할 수 있을 듯.

한편, 극진의 사업이 커지면서 자연스레 공이 있는 카지와라 잇키의 영향력도 커지게 되나, 본 항목에도 설명되어 있듯 카지와라 잇키와 최영의 사이의 관계는 여러모로 애증이 뒤얽힌 복잡한 사이가 되어버린다.

공수도 바보 일대(한국명 무한의 파이터)는 지금도 일본에서 격투기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추억의 만화지만 작가가 멋대로 최영의의 출생 배경에 대한 설명은 빼면서 일본 군국주의에 대한 옹호를 집어넣거나 실제 수련이나 대련 과정과는 관계없이 판타지적인 내용을 마구잡이로 그려넣어 왜곡이 많다는 비판도 받는다. 심지어 총알을 잡는 묘사까지 그려넣는 바람에(!) 최영의 스스로가 관련 질문을 받으면 매우 난처해 했다고. 사족으로, 이후 한국에서도 바람의 파이터나 대야망 같은 만화책들이 유행하며 최영의라는 이름이 많이 알려지게 된다. 재미는 그나마 바람의 파이터가 좀 더 좋은 편인데 이것도 현실성은 저 멀리 가있고 사실과는 전혀 다른 판타지스러운 내용이 많으니 주의. 만화니까 허구성이 어느정도 첨가되는건 어쩔 수 없다 쳐도, 그래도 엄연히 실존인물이 모티브인데 너무 나갔다는 평도 있다. 나중에 오야마의 실제 생애를 다룬 자서전 등이 발간되어 그가 한반도 태생이며 작가의 왜곡에 의해 판타지적으로 과장된 부분들도 있음이 알려졌으나 여전히 극진회관의 대스승으로 존중받고 있다. 물론 지금까지도 잘못 알려진 일화들을 실제라고 믿는 경우도 존재한다.

어쨌든 이 만화의 영향으로 이후 일본매체 등에서 다뤄지는 격투기 바보 캐릭터는 최영의가 모티브인 경우가 압도적이 되었고, 가상의 실전 공수 유파는 극진회관을 모티브로 삼는 경우가 많게 된다. 만화 바키의 '오로치 돗포' 같은 경우는 아예 대놓고 이미지를 차용하기도 했다가 후반부로 가면 강력한 주먹에 대해서 이야기할때 하나야마 카오루를 이용해 최영희의 명언을 인용하고 있다.





 40대 이후

40대 이후로는 제자들을 키우는데 매진하여 일선에서 물러났지만 격투가 기질이 어디 가진 않았는지 하루에 최소 10명 이상과 대련 연습을 계속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렇게 본인 몸을 혹사시키다 보니 이후 정형외과 의사인 장남 최광범도 증언했듯 말년에는 관절염 등으로 이래저래 고생을 좀 했다고 한다. 밖에선 절대무술가 이미지가 있으니 격파도 하고 정정하게 돌아다녔지만 집에 오면 몸이 아프다고 하소연을 했다고 한다. 그래도 평생 현역을 추구했는지 사망 4~5년 전까지도 수련을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다 폐암에 걸려 치료를 받다 호흡부전으로 1994년 도쿄도 츄오구에 있는 세이루카국제병원에서 향년 만 70세로 사망했다.





 격투 관련

상기한 일대기에도 적혀있듯 그의 무용담은 팩트와 과장이 섞여있는 편인데, 핵심만 말하자면 현대 무술에서 중요하게 평가할건 육체 단련의 중요성과 당시 가라테계에서 파격적이었던 풀 컨택트 방식의 대련체계 도입, 이를 기반으로 한 무도계 일파 성립과 인재 배출 등이지 지금으로선 확실히 검증할 수도 없는 갑론을박성 무용담을 가지고 서로 뇌피셜 쓰는게 아니다.

일단 최영의의 명망은 확실히 낮다고 보긴 어려운데, 전 세계를 돌며 여러 사람들을 가르쳤고 그 제자 중에는 일회성 이벤트로 가르쳤긴 하지만 숀 코너리나 요르단 국왕 일가도 있고, 장관도 몇 명 있었던 듯하다. 이게 이후 그가 더 유명해지는데 도움이 된 측면도 있고.

사실 일본 사회에는 사무라이 전통이 남아있는지 최영의처럼 신격화, 영웅화된 무술가들이 꽤 있는 편인데, 미야모토 무사시(이천일류 창시), 가노 지고로(유도 창시), 마에다 미츠요(유도 전파, 브라질리안 주짓수), 다케다 소가쿠(대동류합기유술), 우에시바 모리헤이(아이키도 창시), 후나코시 기친(송도관 가라테 창설)부터 시작해서 미후네 쿠조(유도 10단), 시오다 고조(아이키도 유파 양신관 창시), 사쿠라바 카즈시(종합격투기, 그레이시 가문 격파), 기무라 마사히코(유도), 역도산(스모, 프로레슬링)에 이르기까지 많은 무도가들이 영웅화된 바 있다.

다만 그중에서도 오늘날까지 거대한 일파를 이루고 있는 무도가는 드물 뿐더러, 종합격투기 Pride와 더불어 일본 격투기의 양대산맥이자 세계 입식타격기의 최고봉이었던 K-1의 출발이 극진공수도인걸 생각해 보면 창시자인 최배달의 영향력 또한 결코 무시할 순 없다. 킥복싱 또한 실전공수 VS 무에타이 기획에서 시작하기도 했고 지금도 실전무술하면 극진공수도가 떠오르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태극권의 진노인과 붙었다는 얘기가 꽤 유명하나 이는 루머가 현실이 돼버린 케이스다. 최영의가 태극권 고수가 있다는 소리에 대결을 하러 갔지만, 70세가 넘으신 분이라 대결은 못하고 일주일간 머물면서 서로의 무술을 보여주고 헤어진 케이스인데 그 이야기가 와전되어 흔히 무협소설의 은거 고수 VS 철부지 최영의의 대결이었다고 전해졌다. 하지만 이 부분이야 딱히 그의 실력과 연관된 부분이 아니므로 지적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최영의 무적 전설에서 한가지 고려해야 할 부분은 최영의가 세계를 돌며 강자들과 대결했던 당시에는 거의 '무명인물'에 가까웠다는 점이다. 따라서 현실적으로 그가 대결을 할 수 있었던 상대도 당대의 진정한 최강자들인 복싱 헤비급이나 프로레슬링 챔피언이 아니라 어느 정도 네임밸류가 떨어지는 아마추어 수준인 상대들이 대부분이었음을 고려해야 한다. 지금 기준으로 생각해봐도 UFC 챔피언이 일개 무술가가 도전한다고 곧이곧대로 싸워줄 리가 없다. 게다가 최영의 본인이 밝힌 바로도 정말 강한 상대는 눈 찌르기나 불알깨기 등의 치사한 수법으로 겨우겨우 이긴 경우도 있다고 한다. 그 예로 미국에서는 프로레슬러와 대결하다 도저히 뭐가 안 통해서 치사하게 반칙 써서 이겼다거나 10대 청소년에게 싸우다가 몇번 나가떨어지자 방심한 틈을 타 기습으로 이겼던 적도 있다고 한다. 물론 이긴 건 이긴 거라지만 덕분에 열 받은 관객들의 린치를 피해 도망다니기도 했다고. 일설에는 4~5번 패배했다는 말도 있다. 카포에라를 쓰는 브라질 출신의 노동자와 봉술을 쓰는 요르단 국왕의 보디가드와 10대 브라질 유술 견습생 등이 있다고 전해진다. 물론 UFC 챔피언도 패배 기록이 있는 마당에 컨디션이나 운 등도 중요하게 좌우하는 실전 무대에서 무패 신화가 더 거짓말 같긴 하지만.

자서전을 통해 프로 복서나 레슬러들을 상대로 싸웠다고 하는데 대부분은 기록에 없는 선수들이라고 한다. 프로레슬링은 그렇다 쳐도 복싱의 경우 프로는 물론 아마추어라도 19세기 선수들까지 연감으로 정리되었는데, 최영의와 싸웠다는 선수들 이름은 찾아볼 수 없다. 참고로 이소룡도 아마추어 복싱 경력을 찾아볼 수 있다. 때문에 비판론자들은 특유의 마케팅으로 인기를 끌긴 했지만 과도한 신격화는 지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최배달의 일생 최대 라이벌로 알려진 '톰 라이스'의 경우 바람의 파이터의 작가 방학기가 무작정 월드클래스급의 복서 출신으로 살인 주먹으로 유명했다고 설명했지만 실제론 하와이, 뉴욕 등을 거점으로 활동하던 프로 레슬러였으며, 그와 경기를 치른 바도 있는 루 테즈는 톰 라이스가 풋볼 선수 출신 선수였긴 했지만 아마추어 레슬링이나 유도, 가라테 등을 수련했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으며 최영의와 톰 라이스가 겨루었다는 이야기 또한 금시초문이라 밝혔다. 물론 이 부분은 그가 몰랐을 뿐일 가능성도 있다. 방학기의 만화에서는 역도산과 최영의 사이의 감정의 골이 생긴 계기도 역도산 본인이 패배했던 톰 라이스를 최영의가 이겼기에 자존심이 상해서라는 식으로 설명하지만 역도산과 톰 라이스는 총 16번이나 경기했으며 5승 5패 5무의 전적을 사이좋게 나눠 가지고 있다. 남은 하나는? 이때의 프로레슬링은 지금처럼 WWE와 같은 메이저 단체가 존재하지 않았고, 각 지방 단체들이 순회하며 흥행을 하는 방식이었는데, 역도산, 최영의, 엔도 고기치 등이 이 즈음 미국에서 활동했으며, 시대특성상 워크를 깨고 시멘트 매치[38]로 돌입하는 상황은 잦았으나 만화 등에서 묘사되듯이 지하에서 목숨 걸고 살인 경기를 펼치는 상황은 없었으며, 규모만 작았다 뿐이지 오늘날과 같이 워크가 존재했다. 다만, 초기 프로레슬링은 서커스단과 함께 순회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들과 함께 경기 중간중간 격파 시범 등의 기예를 선보였을 가능성은 있으며 비슷한 이야기를 자서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최배달 본인 말에 의하면 톰 라이스와 붙었다가 한대 맞았는데 나중에 보니 치아가 나갔다고.

참고로 의외라면 의외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실전 레슬링 무도와 같은 개념은 동시대에 남아시아에서 만연하게 퍼져있었다. 관련 얘기는 안토니오 이노키 문서에 가면 있을 것이다. 이곳도 동북아쪽과 비슷하게 서구열강에게 찢기면서 반서구적인 감정과 더불어서 민족심의 고취를 목적으로 이런 식의 맨몸격투에 대한 관심이 많았었다. 다만 동아시아와 다른 점은 동아시아는 오랫동안 폐쇄적으로 이어진 무술들에 대해 초점을 맞췄다면 남아시아는 기존의 전통무술보다는 지금의 무규칙 격투기와 프로레슬링 비슷한 포멧으로 경기장에서 말 그대로 무규칙으로 누구 하나 쓰러질 때까지 싸우는 것에 초첨이 맞춰진 곳이였다.

다만 최영의가 그렇다고 평범한 범인이었냐 하면 그건 또 결코 아닌 것이, 일단 그는 육중한 몸집에도 불구하고 100m를 11초대에 주파할 수 있었고, 150~160kg의 고중량 벤치프레스를 수십회씩 수행했다고 한다. 또 단청의 서까래를 세 개의 손가락으로 잡고 배꼽이 닿을 정도로 끌어올릴 수 있었으며, 한 손 새끼손가락 하나만으로 턱걸이를 15개 해보였다고. 나중에는 자극이 되지 않아 여자나 11살짜리 사내아이를 2명씩을 올라앉게 한 상태에서 수십회를 했다고 한다. 다 떠나 생전 사진만 봐도 심지어 나이가 들었음에도 피지컬과 안광에서 뿜어져나오는 기운이 범인의 수준은 아니다.

실제 2011년 2월 13일 방영된 SBS스페셜 '무림고수 그들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편에 최영의가 자식들에게 말했다는 '소를 때려잡는 조건'이 나왔다.



1) 100 m를 11초에 뛸 수 있을 것.
2) 벤치 프레스 150~160 kg을 쉽게 들어 올릴 수 있을 것.
3) 단청을 손가락 세 개로 잡아끌어 배에 붙일 수 있을 것.
4) 한 손 새끼손가락으로 턱걸이 15개를 할 수 있을 것.
5) 엄지와 검지만으로 동전을 구부릴 수 있을 것.



이걸 다 할 수 있을 때 주먹으로 소를 때리면 소가 즉사할 수 있다고 한다. 이에 기가 막힌 아들들이 "그러면 아버지는 저 조건이 가능하십니까?"라고 묻자 "가능하니까 소를 때려잡았겠지"라고 대답했다.

가능성을 따져보자면 개별적으론 몇개씩 가능한 사람이 제법 있을 것이다. 가령 2~4번을 같이 하는 크로스핏터, 5번을 하는 동호인 스트롱맨 , 1번을 하는 고등부 도대회급 육상선수 등처럼 말이다. 그러나 2~5번을 합치면 세계구를 따져도 꽤나 적은 숫자일 것이며 1~5번을 다 하는 인간은 극소수 초인의 영역일 정도로 교집합이 어렵다. 게다가 저건 최영의 시절의 조건이라는거고, 수련 환경이 개선된 오늘날로 보면 상대 조건은 더 올라갈 수도 있다. 물론 진지하게 따져보면 소를 때려잡는거랑 저런 조건들이 무조건 일치해야 되는건 아니고, 저게 되도 무술 수련 등을 또 해야 되는지라 맹신할 필요는 없지만, 그냥 소를 때려잡으려면 대단한 신체 능력을 가지고 있어야 된다고 최영의가 판단했다는 정도로만 참고하면 되겠다.

실제 최영의가 평가받을만한 부분은 체계적인 웨이트 트레이닝 훈련이나 방법도 많이 알려지지 않은 시대에 근력운동을 통해 근력과 파워를 강하게 만드는 데 큰 노력을 기울였다는 점도 있다. 산 속에서 굶주리며 혼자 수련을 한 에피소드는 만화에서 과장한 것이고, 실제로는 닭꼬치를 몇십 개씩 먹어가면서 영양 보충과 근력 단련에 힘썼다고 한다.

최영의의 저서들을 살펴보면 자주 등장하는 이야기가 '무도의 원류를 따져보면 결국은 투쟁의 기술이다. 실전에서 써먹을 수 없는 무도는 춤과 다른 게 없다'이다. 또한 내공이나 기의 존재같이 애매한 추상적인 개념은 죄다 집어 치우고 격투기 기술을 역학적, 합리적으로 체계화하는 데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인 공수도 서적들을 다수 발간했다. 그리고 이런 점이 서양에서도 합리적으로 인정을 받아 많은 제자들을 얻게 된다.

물론 최영의 본인 입장에선 타고난 유전도 좀 있었던걸로 보이는데, 공수도를 배우기 전에도 맨손으로 싸워서 한 번에 7명까지 쓰러트릴 자신이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무술과 격투기를 하기 좋은 피지컬을 타고난 것에 더해 스스로도 가라테 밖에 모르는 바보, 가라테에 미쳐있다고 할 만큼 연습매니아였으니 세계적으로 유명한 가라테 유파를 창시하고 가라테의 대가가 되었을 것이다.





 카지와라 잇키와의 애증

태평양 전쟁의 패전 건도 있어서 당시 미국인과 대결하여 승리한 최영의는 유명인사가 되었고, 그 때 마침 만화가 카지와라 잇키가 최영의에게 접근하여 둘은 친분을 나누었다. 꼴마초였던 카지와라는 최영의의 무용담에 감복하여 친하게 지냈고 그 인연으로 최영의를 작중 등장인물로 두 번 써보았다. 이게 반응이 좋았을 뿐 아니라 당시 격투기붐이 불고 있었기 때문에 카지와라는 최영의를 소재로 한 작품을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당시 매거진 편집부에서는 토론이 일었으나 이미 논픽션 작품을 다룬 적도 있으니 실존인물이 소재라도 안될 것은 없다는 이유로 연재가 결정되었다. 작화를 맡은 건 이미 작중에서 최영의를 모티브로 한 캐릭터가 나오는 작품 '무지개를 부르는 주먹'을 그린 츠노다 지로였다. 제목은 공수도 바보 일대.

이 만화가 대히트하면서 최영의 개인의 유명세에 비해 정작 도장 자체는 그냥저냥한 수준이었던 극진공수도 도장에도 입문 희망자가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 때문에 최영의와 친분을 맺고 도장을 들락거리던 카지와라를 따르는 사람들도 꽤 늘어나게 되었다.

그러나 작화 담당인 츠노다 지로가 오컬트에 흥미를 가져 연재를 끝내고 싶어했다. 사실 이미 그 시점에서 최영의의 에피소드는 다 써먹은지라 만화는 점점 더 황당무계한 쪽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최영의는 이런 황당무계한 내용에 대해서 난색을 표했다고 하는데 사실 허황된 내용 중에 반절은 최영의의 저서에서 차용해 온 것이고 나머지 반절은 카지와라의 창작이었으니 최영의 측도 마냥 억울하다고만 호소할 수도 없긴 했다.

어쨌거나 츠노다의 강한 희망으로 츠노다는 작화 담당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당시 매거진은 내일의 죠가 연재가 끝나서 더 이상 히트작을 종료시킬 수 없었기 때문에 작화 담당을 카게마루 죠야로 교체하고 연재를 계속했다. 그러나 전술한 것처럼 최영의의 에피소드는 이미 다 써먹었던 탓에 문하생이었던 아시하라 히데유키를 중심으로 작품을 계속했다. 당시 극진공수도는 해외 진출을 주장하는 아시하라파와 보수적인 최영의파로 갈려 있었을 뿐더러 카지와라가 아시하라편을 드니 최영의측에서는 이에 상당한 불만을 표했다.

여기에 최영의와 카지와라가 반씩 출자하여 만든 영화《지상 최강의 가라테》의 수익분배 문제까지 터지자 두 사람은 결별한다. 최영의는 자기를 주인공으로 만화를 그렸던 츠노다를 포섭해서 카지와라를 뺀 상태로 자신을 주인공으로 한 만화 갓핸드를 그리게 했다. 이에 분노한 카지와라는 편집부에 압력을 넣었고 당시 작품 자체도 크게 히트하진 못했기 때문에 갓핸드는 고작 9주만에 끝나게 되었다. 그 와중에 카지와라는 계속해서 츠노다를 괴롭혔고 이에 츠노다는 자기 작품에서 카지와라를 헐뜯는 말을 집어넣었다가 걸려서 카지와라에게 납치당해 사과장을 쓰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한다.

그 후 일본에 방문한 격투가 윌리 윌리엄스와 안토니오 이노키의 매치에서 마침내 최영의가 문하생들과 카지와라를 습격한다는 흉흉한 소문까지 돌았다. 실제로 습격사건이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카지와라는 최영의에게 사과를 요구하였고 최영의가 묵살하여 의형제까지 맺었던 두 사람의 관계는 완전히 파탄나고 말았다.

그러나 말년엔 화해의 기운이 돌기도 했는데, 카지와라가 병으로 쓰러지자 누군가가 익명으로 편지를 보냈고 그것을 받은 카지와라는 최영의가 보낸 편지라고 확신하였다. 그 후 카지와라는 병 때문에 은퇴하기로 하고 마지막이자 자전적 작품이기도 한 남자의 성좌에서 심혈을 기울여 최영의를 묘사했고 이것을 최영의도 마음에 들어했지만, 카지와라가 결국 1987년 병으로 죽는 바람에 생전 직접적인 화해는 하지 못했다.



현재 남아있는 사진이나 동영상을 보면 그냥 인자하고 건장한 중년, 노년 아저씨로 보이지만 실제 만나본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알 수 없는 위압감이 느껴졌다고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