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지원 자살사건
1996년 1월 1일
신정 저녁 뉴스에는 충격적인 뉴스가 전해졌다. 미래가 촉망되던 인기 아이돌 스타 서지원이 19살이라는 젊은 나이로 요절했다는 소식이었다. 더 충격적인 것은 평소 누구보다 밝고 활발한 성격의 그 였기에 주변에서마저 그의 힘든 속마음을 제대로 읽지 못해 충격이 더욱 컸다.
자살전과 후의 과정
1995년 12월 30일
소속 프로덕션 옴니뮤직의 송년회에서 매니저 이병휘 씨가 "나는 너를 최고로 친다"는 얘기를 하자 눈물을 펑펑 쏟았다.
이날 서지원은 2집과 팬들의 반응에 대한 걱정 등. 여러 가지 아픈 마음을 털어놓기도 했다.
1995년 12월 31일
SBS 점프 챔프 출연자들과 친한 선후배들과 송년회를 했다. 이때는 줄곧 밝은 모습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친구 강태석을 집 앞까지 바래다주며.. 늘 하던 인사인 "내일 만나" 혹은 "잘 가" 대신 "나중에 보자"라는 인사를 해 조금은 이상하게 생각되었다고.. 이날 어머님과의 마지막 전화 통화를 했는데.. 목소리가 상당히 침울했다고 한다.
1996년 1월 1일
송년회가 끝나고 새벽 무렵 소속사 전무, 소속사 후배 세진, 승만, 정현과 함께 귀가.
함께 집에 온 전무에게 서지원은 울면서 "나 없어도 잘살 수 있죠? 나 없어도 PR 잘하실 수 있죠?"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그 말을 들은 매니저는 "너 없으면 못 산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들어가서 자라" 집으로 들여보낸다. 마침 신정이라 집에 다녀와야겠다는 전무의 말에 서지원은 적극적으로적극 찬성했고. 집을 나서는 전무에게 오후 6시 이전에는 꼭 집으로 돌아와달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남은 네 명은 집에서 늦게까지 술을 마셨는데 함께 점프 챔프 녹화 테이프를 보면서 연신 "나 잘하지?" 하고 묻기도..
이후 함께 라면을 끓여 먹고 난 뒤 동이 틀 무렵 각자의 방으로 가서 잠이 들었다.
목격자인 후배의 진술에 따르면 이날 저녁에 술에서 깨어나 밖에서 담배를 사서 들어와 피우던 중 침대 위에 누워있던 서지원이 갑자기 입술과 온몸이 파랗게 변한 채 경련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그가 잠을 자던 침대 위에는 노란색 알약 1알이 떨어져 있었으며 방안에는 평소 그가 복용하던 위장약이라고 적힌 빈 약병과 유서를 써놓은 일기장이 놓여져 있었다. 병원에 도착한 그날 밤 9시에 그는 돌아오지 못할 먼 길을 떠났다.
1996년 1월 4일
미국에서 도착한 가족들이 빈소를 지키고 있는 가운데 매니저가 국과수에서 사체 부검을 한 결과 신경안정제로 보이는 300여 개의 알약이 검출되었으며 유서는 부모의 필적 확인 결과 서지원의 자필임이 확인되었다고 발표했다.
그의 직접적인 사인은 약물 과다 복용으로 알려졌지만, 정확한 사인은 그가 삼킨 약 일부가 기도로 넘어가 일으킨 호흡 곤란 때문이라고 한다. 약이 소화되기 전에 기도로 넘어가 호흡 곤란을 일으킨 듯하다.
매우 안타까운 이야기지만, 약으로 쓰러진 환자는 절대로 함부로 옮겨선 안 된다. 그의 경우 부득이하게 후배가 업고 뛰었을 때 약이 기도로 넘어가 상황을 악화시켰을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또 한 가지 안타까운 사실은 이때 병원에서 의사 위 세척이라도 해줬다면 살 수 있었을 거라는 점이다.
서지원의 사후 만들어진 <내 눈물 모아> 뮤직비디오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을 거라곤 전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행복하게 웃던 그의 생전 모습은 오히려 많은 이들을 더욱 가슴 아프게 했다.
서지원의 가족들이 전부 미국에 있었기에 그의 시신은 평소 친하게 지내던 보컬 트레이너 겸 가수였던 박선주 가 대신 확인했다고 한다. 그의 빈소는 이홍렬, DJ DOC, 박선주 등을 포함한 동료연예인들과 소녀 팬들의 울음소리로 가득했으며, 많은 기자들이 찾아와 그의 장례식과 빈소의 모습을 취재해갔다.
1996년 1월 5일
오전 9시 기독교식으로 장례절차를 마치고 중대 병원 영안실을 출발한 운구차는 10시 30분 등촌동 SBS 공개홀 앞에 도착해 노제를 치렀다. 장례 행렬의 맨 앞에는 그와 절친했던 동료 연예인이자 친구인 강태석이 연신 눈물을 훔치면서 영정사진을 들고 앞장서고 있었다. 100여 명의 소녀 팬들이 국화 송이를 영전에 바치며 눈물을 흘리는 가운데 동료 가수 강태석이 조사를 읽었고 잉크, 김태후, 박지원, 박선주, 김준희, 디제이덕, 쿨, 이홍렬 등 생전에 가까이 지냈던 동료 연예인들이 오열하며 서지원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서지원의 유해는 고양시 벽제 화장터의 뜨거운 불 속에서 그는 한 줌의 재로 돌아갔다. 그가 떠난 1996년 1월, 새로운 해를 맞이한지 채 며칠이 지나지 않은 겨울 날 짧은 생을 하늘도 안타까워하듯 잔뜩 찌푸린 하늘에서는 진눈깨비만 흩날리고 있었다.
벽제 골당에 안치되어 있었으나 3년 뒤인 98년, 고인의 영원한 안식을 기리며 지리산 꼭대기 노고단 부근에 뿌려졌다.
유서와 마지막 음성 메시지
세상을 떠나기 직전, 서지원은 흐느껴 울며 자신의 무선호출기 사서함에 팬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에게 마지막 메시지가 수록된 3집 앨범 인트로 목이 멘 듯한 목소리로 메시지를 남겼다. 오직 음악을 하기 위해 고국을 찾았던 청년이 느꼈던 이상과 현실의 괴리감에 방황하다 이생에서는 답을 찾지 못해 스스로 삶을 마치며 팬들에게 진심이 담긴 마지막 메시지였다.
여러분 서지원이에요. 서지원입니다.
여러분 한 해 동안 저 사랑해주신 거 정말 감사하구요.
더 이상 저를 못 보게 되더라도 저를 항상 기억해주시구요
여러분 다 몸 건강히 새해 복 많이 받으셨으면 좋겠구요.
여러분 사랑합니다.
그것만은 기억해 주세요.
세상을 떠난 원인
왜 그런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었는지는 본인 말고는 모든 걸 알 수도, 이해할 수도 없기에 섣불리 추측할 수 없다. 기사와 인터뷰 등에 남겨진 내용을 발췌하여 함께 정리했다.
사람들 앞에서 새 노래 부를 생각을 하면 너무 행복해서 소름이 끼친다'고 말할 정도로 2집 앨범에 대한 애착이 강했고 군 문제는 아직 결정된 바가 없으며 조만간 재검을 받을 예정이었기 때문에 그런 문제들로 자살을 했을 것이라는 추측은 납득이 안 간다는 것이 측근의 말이다. 부모님의 불화, 군대문제, 2집에 대한 불안감은 표면적인 것 일뿐 그가 생을 포기한 이유는 아니었다. 그에게 절실히 필요했던 것은 진정한 '사랑'과 따뜻한 '관심'이었다. 그 자신 너무나 많은 사람을 사랑했기 때문에 자신의 죽음을 통해서 그 동안 그를 외면했던 주변 사람들의 마음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1996년 기사 내용)
일부 언론의 편파적인 보도로 인해 그가 단순히 2집 앨범 성공에 대한 부담감 으로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하여 나약한 청년으로 비춰질 우려가 있지만 그를 둘러싸고 있었던 현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
음악을 사랑해서 가수를 꿈꿔왔고 오디션에 합격했던 그 날. 설렘에 밤잠을 설쳤다며 행복한 꿈에 부풀었던 순수한 소년이
가족의 품을 떠나 돌아온 한국에서 마주하게 된 현실의 벽은 너무나 크고 암울했기에 아까운 청춘에 자신에게 얹힌 부당한 현실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떠나간 청년이었다.
한국 연예계(기획사)의 열악한 환경
태어나서 가장 기뻤던 일은?: 공개오디션에 뽑혔을 때 ‘나도 가수가 될 수 있구나’하는 생각에 밤잠도 못 자고 설레던 기억.
1995년 잡지 주니어 인터뷰 내용
그는 한국 기획사가 주최한 미주 공개 오디션에서 1등으로 오디션에 합격해 1993년 한국으로 왔다. 당초 가수 데뷔를 약속했던 회사에서 데뷔를 목표로 회사에서 제공하던 숙소에서 지냈지만 회사의 사정으로 데뷔가 무산되고 만다. 어린 나이에 대학 입학까지 포기해가며 온 한국에서 겪게 된 좌절로 이후 미용실 등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직접 기획사와 접촉하였고 당시 소속 회사 사장을 만나 데뷔 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1994-5년 당시 서지원의 소속사 옴니뮤직은 대형 기획사가 아니였으며 그의 데뷔 전 까지는 이렇다 할 성공한 연예인을 배출해내지 못했다. 그나마 그가 유일하게 성공한 연예인이었고, 자연스럽게 모든 직원들은 그에게 거는 기대가 많았고 후배들은 이미 그를 성공한 스타로 생각하고 존경의 대상이었다. 실제로 소속사 사람들 전체를 서지원 혼자서 먹여 살리고 있었다고 해도 될 정도로 그가 짊어진 짐이 컸다.
2000년대 이전 많은 음반 제작사들의 소속 연예인에 대한 횡포는 이루 말할 수 없었을 정도였는데, 제대로 된 대우를 해주는 소속사는 손에 꼽을 정도로 연예인들을 혹사시키고 수익은 모조리 회사가 가져가는 형식의 회사가 많아서 그로 인해 피해를 보는 가수들이 허다했다. 90년대 인기 있었던 대표 가수들 이 과거 이야기에 항상 등장하는 소속사 얘기에 경악할만한 에피소드가 많은 걸 보면 당시 연예계가 얼마나 열악했는지 예측 가능하다.
김경호의 자서전 멈추지 않으면 끝나지 않는다: 로커 외길인생 김경호가 전하는 생을 건너는 법 에서는 서지원의 이야기가 짤막하게 나오는데, 당시 서지원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알 수 있다.
"힘들어요. 화려해 보여도 실속은 없고요. 혼자 지내는 오피스텔 생활도 너무 외로워요."
당시 연예인들과 소속사의 관계는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일반적인 계약으로 묶여 있지가 않았다. 연예 기획사가 투자를 하기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기획사가 지나치게 많은 이득을 취하는 형태였다. 특히 미국에서 살다가 온 지원이의 입장에서는 기획사의 소속 연예인의 그처럼 부당한 관계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몇 번이나 그 문제에 대해서 불만을 이야기했지만 도무지 자신의 입장을 받아들이지 않는 소속사의 행태에 지원이는 지쳐있었다.
활동 당시에 그의 회사에서 어떻게 수익 관리를 했었는지 짐작할 수 있는 인터뷰했던 기사 내용
생활비는 거의 매니저가 관리하고 있다. 식비, 의상비는 물론 간식비 CD 구입비, 병원비, 화장품 구입비, 차량 유지비와 집 유지비도 모두 매니저가 관리하고 있다. 서지원씨는 매니저에게 2~3일에 한번씩 5~10만원 용돈을 받고 있다. 자신이 번 돈을 제대로 쓰지도 못하지만 불평 한 번 하지 않는다고 매니저가 칭찬을 한다. “어떤 아이스크림을 좋아하느냐고요? 월드콘이 제일 좋아요. 맛있고, 싸고 돈이 있을 때는 베스킨 라빈스를 먹지요.”
연예인답지 않게 소박한 그의 모습이 인상 깊었다. 1995년 -쎄씨 인터뷰-
그가 활동할 당시 소속사에게 받은 대우가 얼마나 형편없었는지, 그가 한국에서 생활했던 오피스텔 의 전세금을 그가 소속사와 계약할 때 받았던 계약금의 대부분으로 충당 했다고 한다.
2집 앨범에 대한 부담감
1995년은 IMF 이전, 한국 가요계의 르네상스 시대로 불릴 정도로 대형 가수들이 많이 나와 엄청난 히트곡들이 탄생했던 한 해였다. 그만큼 가수들의 경쟁이 치열하던 시기였고 당시 일반 대중들에게 서지원의 인식은 그저 잘생긴 외모의 아이돌 스타 정도의 인식이 조금 더 컸었다.
소속사는 각종 버라이어티 쇼나 코미디 프로에 더 많이 출연시켜 대중들에게 이름을 알리는 길을 택했는데 사실 서지원은 자신의 외적인 모습을 어필하는 것보단 음악적인 모습으로 승부를 보길 원했었다. 한 사람이라도 더 자신의 이름을 알리는 것이 중요한 신인 시절에 어떤 것이 더 낫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는 당시 올곧은 성격의 스무살 어린 청년이었고 서지원에 비디오 형 가수로 인식되는 것이 아무리 인기가 올라간다 해도 자신이 원하던 길과는 방향이 달랐기에 어쩌면 그리 좋지만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상과 현실에 괴리에서 고민들에 이러한 자신의 이미지를 탈피해보고자 2집 앨범은 전보다 더욱 욕심을 냈으며 자신이 직접 작곡가들을 찾아 나서는 등 애착을 가지고 준비했지만 한편으로는 과연 1집 앨범보다 성공할 수 있을까 초조하고 불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을 것이다.
몸과 마음의 체력 저하
가수 서지원 늑막염 후유증 피로 겹쳐 '얼굴 반쪽'
천고마비의 계절인데도 또 다른 시작의 가수 서지원의 얼굴은 반쪽이 되어 주위 사람들은 안타까워 하고 있다.
원래 183cm 60kg의 가냘픈 몸매인 서지원의 현재 체중은 52kg. 지난 9월 중순 늑막염으로 쓰러져 일주일간 입원했던 그가 아직도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는데다가 2집앨범 제작을 위해 밤낮으로 땀을 흘리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달 입원할 당시부터 미국에서 귀국한 어머니가 몸에 좋다는 영양제와 녹용 등 온갖 보약을 구해와 복용했지만 원래 체중을 회복하려면 다소 시간이 걸릴 듯.
1995년 신문기사
활동 당시에 체력적으로 심적으로 많이 힘들었던 그의 체중이 날이 갈수록 빠지고 늑막염으로 병원 신세까지 지게 되어 결국 키 180CM 몸무게 52KG까지 체중이 빠졌다고 한다. 소속사에서는 서지원의 어머니에게 직접 전화로 대한민국 에 와서 서지원의 보약 좀 지어달라 부탁했고 이에 어머니가 한국으로 오셔서 직접 서지원을 케어해주시기도 했었다.
가족 문제
서지원 사후 모 방송 인터뷰에서 한 관계자는 ‘가정적으로 애정 많이 못 받고 자라났다’라고 인터뷰를 하는데 전국에 나가는 방송 인터뷰임을 생각하면 대단히 경솔한 발언으로 보일 소지가 있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가족이 아닌 제삼자가 함부로 말할 부분이 아니다. 부모님의 별거를 매우 마음 아파했으며 동생을 무척이나 아꼈던 그가 애정을 못 받고 자라났다는 말에는 동의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부모님의 별거라는 상황이 그를 힘들게 했음은 부정할 수 없다.
학교 다니실 때 가장 갖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었나요?
사실 제가 어려서부터 귀하게 자랐어요. 그래서 갖고 싶은 건 거의 다 갖고 자랐거든요. 그래서 특별히 갖고 싶었던 건 없어요. -1995년 잡지 뮤직라이프 기사-
아픈 기억이지만 92년 LA 폭동은 그에게 상처를 줬다. 거의 10년을 걸쳐 쌓아 올린 희망들을 일순간에 잃어버린 그 이후로 지금까지 힘들다. 얼마 전 미국에 들어가서 보니 하나뿐인 동생이 다 떨어진 신발을 신고 있었다고 한다. 이를 본 서지원은 저려오는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마음속 깊이 다짐했다. 어서 돈을 벌어 동생 신발도 사주고 학비도 대 주리라고.
–1995년 잡지 기사 내용-
“지원이는 어렸을 때부터 뭐든지 남의 도움 없이 혼자서 다 알아서 하고 집안일은 물론 동생도 잘 돌보았어요.. 책임감이 강한 아이였죠.. 지원이 이름이 누가 되지 않기 위해 사람들 앞에서 내가 지원이 아버지라는 내색을 안하고 있으면.. 지원이가 더 "아버지 걱정 마세요. 꼭 성공해서 아버지 잘 모실 거예요"라며 저를 위로했어요. 12월 31일 갑자기 옛날 생각이 나서 밤하늘의 별을 보았어요.. 평소 병훈 이 노는 모습을 비디오에 자주 담아놓았었는데 그날은 까만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 하나를 찍었죠.. 그런데 바로 다음 날 지원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어제저녁에 왜 갑자기 옛날 생각을 했을까. 그게 무슨 징크스였구나….' 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아버지 인터뷰-
사후
그의 죽음을 기리기 위한 추모 콘서트에는 3,000여 명의 관객이 몰려들었는데, 당시 서지원과 친하게 지냈던 베이시스 의 정재형 역시 무대에 올라 노래를 부르던 중 치솟는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끝내 무대 위에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렸다. 서지원의 사망 직전 2집 녹음을 할 때 그를 많이 혼냈던 게 너무나도 미안했다고 한다.
그의 사후, 2집 앨범 타이틀 곡은 각종 방송사 가요프로그램에서 1위를 차지했고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내 눈물 모아>가 1996년 3월 30일 자 MBC 인기가요 베스트 50에서 1위를 하던 날에는 그의 어머니가 먼저 떠나간 아들을 대신해서 무대에 올라 상을 받으며 눈물을 흘렸다. 어머니는 눈시울을 붉히며 "우리 지원이도 지금 보면서 정말 좋아할 거예요."라는 수상 소감을 남겨 시청자들의 사람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서지원의 <내 눈물 모아>가 1위를 차지하던 날 가수는 그 자리를 지킬 수 없었으나 팬들은 변함없이 그 자리를 함께하며 서지원을 위해 함께 노래했다. 그가 세상을 떠난지 24년이 지난 현재도 서지원은 팬들은 여전히 활동을 하고 있으며, 당시 서지원을 응원했던 팬들에 더해 그가 세상을 떠난 이후 그의 팬이 된 사람들이 모여 변함 없이 그를 지지하는 팬 활동을 20년 이상 조용히 이어나가고 있다.
죽음에 대한 루머
그가 세상을 떠난 지 얼마 안 되어 이상한 소문이 돌았다. 사실 그가 요절 판정을 받았을 때 아직 숨진 게 아니었으며, 나중에 시신을 안치한 병원의 영안실에서 깨어났다는 이야기였다. 그가 시신 안치함에서 나오기 위해 필사적으로 소리를 지르고 발버둥 쳤지만 아무도 문을 열어주지 않아 그는 끝내 그 안에서 생을 마감했고, 나중에 누가 열어보니 문 안쪽엔 손톱으로 긁은 자국이, 얼굴엔 눈물 자국이 있었다는 내용인데 당연히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이야기다.
일단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소속사 사람들과 병원 사람들이 며칠 동안 밤낮 구분 없이 거의 십분 간격으로 영안실을 들락거리면서 시신을 확인했기 때문에 만약 그가 정말로 깨어났다면 곧 누군가 알아챘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말도 안 되는 루머 때문에 그의 시신은 가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 차례 부검 까지 받았다. 행여라도 그런 소문을 진실로 여기는 사람이 있다면 그냥 비웃고 넘기자. 그야말로 이미 죽은 사람 두 번 죽이는 악성 루머다.
서지원이 세상을 떠난 뒤, 그의 열렬한 팬이었던 인천 의 한 여중생은 1996년 5월 14일 그가 보고 싶다며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 또한 돈을 위해 무리하게 연예인들을 혹사시키는 연예계와 소속사들의 횡포에 비난이 쏟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