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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기훈 유서대필 사건 '자살방조죄' 무죄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 자살 사주, 이른바 자살방조죄에 대한 대법원 판결 가운데 실제로 죄가 인정된 유일한 판례였으나 결국 무죄로 판명된 사건.


1990년 3당 합당 직후 성립된 여당인 민주자유당은 6월 항쟁 이후의 개혁적 분위기를 일거에 뒤집은 보수적 정치격변이었다. 이에 대해 학생운동권을 비롯한 재야세력, 야당(평화민주당)은 강하게 반발하였다. 심지어 당시 대학가에서는 80년대식의 거리시위가 재연되기까지 하였는데, 1991년 4월 26일, 명지대생 강경대군이 경찰이 휘두른 쇠파이프에 맞아 숨지면서 시위는 더더욱 확산되었다. 이로부터 두달간 연쇄적으로 분신자살이 일어난다.

이렇게 계속 분신자살이 일어나자 당시 서강대 총장인 박홍 루카 신부는 서강대 메리홀 기자회견에서 "죽음의 블랙리스트가 있다. 구체적으로는 모르겠지만 우리 사회에는 죽음을 선동하고 이용하려는 반생명적인 죽음의 세력, 어둠의 세력이 존재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어 그는 그 배후세력을 '전염병 같은 이들'이라 규정한 뒤 "이들은 그늘에서도 엄청난 힘을 갖고 자신도 죽고, 남도 죽이는 물귀신 공법으로 물 마시듯 폭력을 전염시키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 발언은 큰 파장을 일으켰고, 검찰은 이에 호응하여 분신 조장 세력을 밝혀내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1991년 5월 8일, 김기설 당시 전국민족민주연합(통칭 전민련, 한국진보연대의 전신) 사회부장이 서강대에서 분신자살했다. 그런데 그의 친구인 동 단체 총무부장 강기훈이 유서를 대필해줬다는 혐의를 받게 된다. 이에 검찰은 바로 강기훈 씨에 대해 유서대필 등 자살방조 혐의로 압수수색 영장을 발급받아 강기훈의 필적을 입수하는 등 강기훈을 자살방조 피의자로 특정하고 수사를 진행했다. 또 검사 및 검찰 직원은 관례와 달리 국립과학수사연구소를 방문해 필적 감정문건에 대해 설명했고, 국과수 직원은 "어떠한 감정을 원하느냐?"고 전화통화를 하기도 했다.

당시 국민들 사이에선 연속되던 분신자살에 '사정은 이해한다만, 그렇다고 저렇게 극단적으로까지 해야 하나'라는 회의론이 돌고 있던 것도 사실이었는데, 마침 뉴스에서 학생이 친구를 도와 자살을 방조했다는 사건이 보도되자, 운동권에 대한 국민의 신뢰도는 땅에 떨어지게 된다. 그리고 결국 국민들이 등을 돌린 학생운동은 실패로 끝난다.

강기훈과 그의 주변인들은 결백을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검찰에 의하여 자살방조죄로 기소된 강기훈은 1992년 7월 대법원에서 징역 3년, 자격정지 1년 6개월이 확정된다.



그리고 여기에서 끝났다면 그냥 운동권의 흑역사로 남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 사건의 쟁점은 역시나 필적이었다. 국내에는 필적감정인들이 극소수였기에 공정한 감정소견을 기대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국가적으로 큰 이슈가 된 사건에서 소신있는 감정을 하다 자칫하면 업계에서 퇴출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객관성을 담보하기 위해 일본인 감정인에게 필적감정을 의뢰하기에 이른다. 본 감정인은 강기훈씨의 필적과 유서의 필적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결과를 내놓았다. 그런데 법원은 그 감정결과를 배척하고, 도리어 일본인 감정인을 호통쳤다. 그 이유는 한글을 모르는 일본인의 감정은 신빙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 점에서 법원이 강기훈 씨의 혐의를 너무 빨리 예단하지 않았느냐는 비판을 제기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로 인해 감옥에 갔다가 명예를 잃고 나온 강기훈은 그를 허위 감정으로 고발한다. 독재 정권의 주구가 되어서 유서를 허위로 감정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국과수 간부 김형영은 무혐의 판정을 받는다. 사실 이것은 어느정도 예상되어 있었는데, 특별한 이유 없이 검찰이 자신들의 주장을 허물어뜨릴 수도 있는 국과수 증인을 유죄로 판단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훗날 김형영은 토지 사기 사건때 토지문서를 허위로 감정해 줬다고 콩밥을 먹는다. 강기훈은 김형영은 사기꾼들과 짜고 허위감정을 하는 나쁜 사람이다. 그래서 유서 사건도 허위로 감정했을 것이다.라고 주장하면서 재심을 청구하게 된다.

그런데 김형영은 그 토지 사건에서도 무죄 판결을 받는다.



그러나 반전이 있었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는 이 사건을 재조명해 국과수에 필적감정을 재의뢰했다. 국과수는 이 사건을 맡아 5명의 감정인으로 재감정했고, 2007년 11월 이들은 필체가 다르다는 의견을 내어 1991년 당시의 감정을 뒤집었다. 또한 진실화해위에 출석한 1991년의 김형영 감정인도 "감정인에 따라 판정이 다를수 있다"고 말하여 자신이 틀렸을 수도 있음을 간접 시인했다.

진실화해위에서는 강기훈씨가 무죄를 주장할 충분한 근거가 있다고 판단했고, 2009년 서울고법 형사10부(부장 이강원)는 강씨가 낸 재심 청구를 받아들였다. 서울고검은 다음날 즉각 항고했으나, 2012년 대법원이 재심 개시를 결정하면서 이 사건은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갔다.



재심결과에 따라 '강기훈 씨가 유서를 썼느냐, 안 썼느냐?'의 문제는 강기훈 씨가 쓰지 않은 것이 입증이 되었다. 그렇다면 '자살한 김기설 씨 본인이 유서를 썼느냐, 안 썼느냐?' 혹은 '강기훈/김기설 씨 아닌 다른 자가 유서를 썼느냐, 안 썼느냐?'가 더 중요한 논점이 되었다.

변호인 측은 김기설 씨 본인이 유서를 작성하였다는 주장과 함께 강기훈 씨를 공소제기한 것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주장한 바 있다. 즉 무고한 사람을 잡기 위해 검사가 공소권을 남용했다는 것인데, 법원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즉, 자살방조죄로 공소한 것은 문제가 없지만, 유서를 작성한 사람은 강기훈 씨가 아니라는 것.

여기서 생각해야 할 점이 있다. 법원이 변호인의 주장을 인용하느냐 마느냐에 따라 책임 소재가 다소 엇갈리게 된다. 강기훈 씨는 별론으로 하고, 김기설 씨가 유서를 적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살방조죄로 공소제기한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자살방조죄를 저지른 범죄자가 따로 있다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검찰 측은 무고한 자에게 공소를 제기한 것 뿐만 아니라 자살방조죄를 저지른 누군가를 놓친 것이 된다.

한편 변호인의 주장을 받아들이면, 검찰은 그릇된 공소제기를 한 것은 물론 법원은 그릇된 심리와 판결을 한 꼴을 인정하게 된다. 즉, 사법부까지도 부끄러워질 형국인 것. 이 또한 반박하기 위해 김기설씨가 유서를 작성했음을 뒷받침할 만한 자료도 보도하였다. 이에 대해 관계 법조인들은 사법부가 자기들의 과오를 면피하기 위한 허울 뿐인 재심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재심에 결과에 대해 모두 기뻐하고 축하해줘야 할 상황이지만 강기훈 씨 뿐만 아니라 그의 지인들은 오히려 안타깝고, 슬프다고 한다.

2018년 9월, 검찰 과거사 진상조사단에서 28년만에 이 사건을 재조사중인 걸로 확인되었다. 조사의 핵심은 노태우 정부가 정부차원에서 이 사건을 기획, 조작했는가의 여부인데 당시 김기설 씨가 분신한 당일 오전 7시에 열린 치안관계기관 대책회의가 열렸고 대통령 비서실장과 안기부장, 법무부장관,노동부장관 등이 참석한 이 회의에서 분신사건의 배후를 밝혀야 한다는 결정이 내려졌고 이후 신속하게 사건 발생 9시간 후에 강기훈씨의 자택등에 대한 압수수색이 벌어진 것을 의심하고 있는 것. 위원회는 당시 회의 참석자들을 소환해 회의에서 무슨 내용이 오갔는지를 추궁하고 있는 걸로 알려졌다. 만약 이 대책회의에서 김기설 씨의 분신을 정권차원에서 왜곡 조작하기로 결정했다면 사건의 파장은 만만치 않을 것으로 보이며, 특히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이던 정해창이 주관한 회의였음도 알려져 정 비서실장이 관련 내용을 노태우 당시 대통령에게 보고했는지의 여부도 논란이 될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