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정부의 실질적인 2인자로 그전에 박정희 정권에 인사로 대입하면 그 권세와 공작과 신임이 이후락+차지철이라 할 수 있다.
수도경비사령부 제30경비단장으로, 직속상관인 장태완 소장의 명령을 무시하고, 군내 불법 사조직인 하나회의 수장 전두환을 따라 12.12 군사반란에 가담하였다. 장태완이 말한 "반란군 놈의 새끼들", "역적놈의 새끼들" 중 한 명. 게다가 실제로 장태완은 자신의 부하들에게 "(장세동을) 발견 즉시 사살하라"는 명령까지 내리기도 했다.
군인시절 성동공업고등학교 졸업 후 1960년 육군사관학교를 16기로 졸업하고 하나회에 가입하였다. 하나회는 PK, TK 등 경상도 출신 군인들이 주축인데 호남 출신인 장세동이 가입한 건 그만큼 장세동이 소위 '난 놈'으로 통했던 셈.
월남전에 파병된 장세동은 퀴논 북쪽 24 km 탄광 지역에서 베트콩의 공격을 받고 어깨에 총격을 당하여 중상을 입었지만 견디면서 전투를 계속해서 부대원들의 사기를 올려 결국 적 43명을 사살하고 1개 중대를 전멸시키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그후 귀국해서 육군 수도보병사단 30경비대대에서 작전장교로 근무하다가 두 번째로 베트남에 파병을 갔는데 이때 베트남에 와있던 전두환과 인연을 맺게 된다.
귀국 후 전두환이 제1공수특전여단장을 할 때 장세동은 그 밑에서 장교로 근무하는 등 전두환의 심복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그 후 육군본부와 대통령경호실 경호관을 거쳐 1977년 대령 시절에 수도경비사령부 제30경비단장으로 부임하는 등 승승장구하였다. 다만, 장세동이 전두환의 힘만으로 군내에서 출세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이미 전두환과 인연을 쌓기 전에 베트남전에서 주목받을 정도의 무공을 쌓았기 때문에 귀국 후 군내에서 출세가 보장된 상황이었다. 때문에 장세동의 능력과 자질을 알아본 전두환이 장세동에게 먼저 접근하여 자신의 심복으로 만든 것이라 보는 것이 더욱 타당하다.
1979년 12.12 군사반란 때 수경사 제30경비단장으로서 지휘계통을 어기고 하나회 인맥에 의해 신군부에 가담하고 직속 상관인 장태완 수도경비사령부 사령관을 체포하였다. 이 공로로 준장에 승진하며 육군특수전사령부 제3공수특전여단장을 맡게 되었다.
1981년, 현역 장군 신분을 유지한 채 제3공수특전여단장에서 대통령경호실장으로 임명되었다. 여느 육군 장성들처럼 육군참모총장을 꿈꾸었던 장세동 개인으로서는 별로 원치 않던 자리였으나 각하가 하라면 해야지 어쩔 수 있겠나 이는 전두환이 허화평 비서실 보좌관과 허삼수 사정수석비서관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다. 이듬해인 1982년 장영자·이철희 금융사기 사건 이후 전두환이 경호실의 위상을 높여 허화평 허삼수를 압박하는 목적으로 장세동을 소장으로 진급시켜주었다.
장세동은 청와대 경호실장과 안기부장으로 재직할 시절 대통령 경호가 단순히 신변을 보호하는 업무를 넘어 대통령의 심기까지 편안케 해야 한다는 이른바 심기경호를 펼친 것으로 유명하다. "대통령의 마음이 편안해야 국정도 잘 되니 심기까지도 경호해야 한다"는 뜻으로, 장세동이 만든 신조어다.
실제로 장세동은 전두환이 산책하다 돌부리에라도 걸리면 심기가 불편해질 수 있다며 도로 평탄화 작업을 지시하고, 그것도 성에 안 차 산책로에 쌓인 새똥까지 녹여 낼 수 있는 약품을 개발하라는 지시했다. 또 전두환이 찾으면 늘 5분 이내로 갈 수 있게 항상 대기했으며 호출 명령이 떨어지면 즉시 머리 손질을 하고, 전두환이 쓰는 것과 똑같은 향수를 뿌리고, 윗옷 양 호주머니에는 지도와 메모용 수첩을 반드시 지참해서 갔다고 한다. 이른바 깔끔하고 단정한 외모로 전두환의 심기를 편안하게 해서 경호 업무 수행중 전두환이 물어볼 때 즉시 대답하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지나칠 수준의 그의 행동은 다 대통령의 심기를 고려한 행동이었다.
1983년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로 인해 경호실장으로서 책임을 져야함에도 불구하고 노신영 국가안전기획부장과 함께 유임되어 직책을 계속 수행했던 것을 본다면, 전두환은 단순히 세력 견제용으로 장세동을 불러들인 차원을 넘어서서 권력다툼이 난무한 청와대 내부에서 장세동을 매우 신임하고 심적으로도 매우 의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사실 신임도 신임이지만 사건 자체도 장세동에게 책임을 묻기엔 조금 곤란한 측면이 있었다. 노신영 역시 비슷한 이유로 유임되었다.
1984년 12월 육군 중장으로 예편하였다.
민주화 요구가 거세진 1985년 국가안전기획부 부장에 임명되었다. 이때 노태우의 손아래 사촌 처남이자 당시 대통령비서실 법률비서관 겸 정무비서관이던 박철언을 자신의 특별보좌관으로 데리고 갔다. 그리하여 정권 후반기에 노태우, 노신영 등과 함께 후계자로 주목받았다. 그가 국가안전기획부를 맡았을 때 일으킨 사건만 여러 건이다. 수지 김 간첩 조작 사건, 부천 경찰서 성고문 사건, 평화의 댐 사건, 통일민주당 창당 방해 사건, 게다가 야당 국회의원 빼오기 같은 공작에는 꼭 그의 그림자가 있었다.
전두환 퇴임이후 전두환의 심복으로 찍혔기 때문에 같은 신군부 출신인 노태우가 집권한 후에는 전혀 권력을 얻지 못하고 청문회에 불려다니는 신세가 되었다. 하나회 내에서 전두환 파벌과 노태우 파벌이 경쟁하게 되었고, 전두환계인 박희도, 최세창 등이 줄줄이 정리되는 상황 속에서 경호실장과 안기부장을 지낸 장세동은 눈엣가시라고 봐도 무방했다.
장세동은 청문회에서는 비교적 당당한 모습으로 일관하여 의리의 사나이, 의리의 돌쇠라는 말을 듣기도 했는데... 노태우의 장세동 격 심복이 비자금 사건이 터지자 바로 미국으로 도망갔던 것과 대비되어 전두환이 인복은 많았다고 비교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사실 전두환이 현재까지 건재한 이유는 전두환의 리더십이 매우 뛰어났고, 그에 감화된 측근들이 버텨 주었기 때문이라는 평가가 많다. 이 과정에서 재밌는 설이 있는데 통일민주당 창당 방해사건으로 1993년 장세동이 전두환을 대신해서 자신이 뒤집어 쓰고 감옥에 갔고 출소한 뒤 바로 전두환을 찾아가 인사하며 '각하! 휴가 다녀왔습니다!' 했다고 하며, 전두환은 장세동을 크게 치하하며 장세동에게 대략 수십억을 줬다고 한다. 참고로 이 일화는 썰전에서도 소개되었는데 장세동이 받은 돈이 18억이란 것을 알자 김구라가 한 말이 할 만하네 돌쇠! ...
여러번 5공세력을 규합하여 정계에 진입하려고 했으나 너무나 음험한 이미지가 굳어져서 할 수 없었다. 전두환이 나들이라도 하면 항상 따라다니는 모습이 언론에 보도되기도 했다. 그러다가 김영삼 대통령 시절 소위 "역사 바로 세우기" 때 전두환과 함께 구속되어 12.12 때 반란 가담혐의로 3년 6월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김영삼 대통령이 1997년 12월에 김대중 대통령 당선인과의 합의를 통해 사면시켰고, 1998년에 최종적으로 복권되었다. 하지만 군인연금은 잘렸다.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다. 수많은 정치인들이 눈앞의 이익을 위해 당적을 옮기는 등 철새 행각을 벌이며 의리와 소신이 사라지고 배신과 변절이 난무하는 시대에는 자신과 같은 의리 있는 사나이가 나서야 어지러운 사회를 바로잡고 국력을 신장할 수 있다는 명분이었는데, 어차피 본인은 본인에게 개밥 줄 상대에게 충성한 거지 국민에게 충성한 건 아니니, 전두환도 지원을 안 해주게 된다. 이로써 득표율이 처참할 듯하자, 투표일 하루 전날 후보를 사퇴하였다. 전두환의 말로는 출마 전까지 극구 반대했으나 기어코 출마를 해버리자 "세동이도 나이 먹으니 내 말을 안 듣더라"고 말하기도 했다.
당시 군소후보 토론회에서 사회당 김영규 후보에게 극딜을 당했다.
“지난 79년 오늘 군사쿠데타가 일어났는데 오늘 그 정권의 하수인과 같이 자리한 것이 안타깝고 참담한 심정이다."
라고 했었다.심지어 토론 이후에도 김 후보는 '"쿠데타의 주역과 악수하지 않겠다"'는 뜻을 토론회 전부터 밝혀 끝내 장세동 후보와 악수를 나누지 않았다. 이는 '과거 청산'을 공약으로 내세운 사회당의 정책이 있기 때문이었다.
2013년 11월, 취재파일 K에서 수지 김 간첩 조작 사건으로 인해 장 씨에게 청구된 구상금 6억여 원이 아직 납부되지 않았다는 기사가 보도되었으며, 2014년 6월 13일에는 장세동 등 12.12 군사반란에 가담한 장성 10명이 국방부를 상대로 군인연금 지급 거부 취소소송을 제기했으나 원고 패소 판결했으며, 위헌법률심판제청 또한 기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