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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사회.정치.역사.인물

인간의 탈을 쓴 악마 하판락

 

일제강점기 시절에 독립운동가와 기독교도에 대한 잔혹한 고문으로 악명을 떨쳤던 친일 경찰로, 해방 후에도 처벌을 받기는 커녕 부유한 사업가로 살아왔다는 사실까지 밝혀져 더욱 큰 국민들의 공분을 산 친일파이자, 인간 쓰레기이다. 제5공화국 시절에 박처원, 이근안이 있었다면 일제강점기엔 김덕기, 김태석, 노덕술, 하판락이 있었다. 앞에 언급된 인물들보다 유명세는 덜하지만, 악명은 노덕술보다 한 수 위이다. 창씨명은 카와모토 한라쿠(河本判洛), 카와모토 마사오(河本正夫).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1912년 2월 15일 경상남도 진주군 성태동면 관지동(현 진주시 명석면 관지리)에서 아버지 하한운(河漢云, 1887. 5. 24 ~ 1962. 8. 16)과 어머니 동래 정씨(1887. 2. 2 ~ 1966. 2. 26) 사이의 3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하판락의 형은 명석면 부면장을 지낸 면서기였고, 그의 남동생은 일본으로 유학하고 좌익 운동에 가담했다가 6.25 전쟁 당시에 월북했다.

진주고등보통학교에 재학하다가 1930년 1월 17일에 진주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이 주도한 만세 시위에 참여하다가 진주형무소에 구금된 후 동년 2월 9일에 풀려난 적도 있었고, 1932년 진주고등보통학교(3회)를 졸업한 후 진양군청에서 고원(雇員)으로 근무했다. 그 뒤 1934년 2월에 처음 경상남도경찰부 외사계에 순사로 입직하여 일본 제국의 경찰관이 되었다. 1936년 순사부장으로 승진하고 이듬해인 1937년 경부보로 승진하여 경상남도경찰부 고등과 외사주임이 되었다. 이후 이후 수많은 사건을 '해결'한 '공로'로 사천경찰서를 거쳐 부산 수상경찰서 고등과 외사계 등지에 근무하였다. 하판락은 1940년 2월에 창씨개명령이 실시되자 '가와모토 한라쿠(河本判洛)'로 개명했으나, 이듬해에 완전한 일본식인 '가와모토 마사오(河本正夫)'로 재개명했다.

하판락은 일제의 고문 경찰로서 독립운동가, 기독교인, 공산주의자들을 고문한 것으로 악명을 떨쳤는데, 그 악행이 얼마나 극심했으면 당시 항일투사들이 가장 두려워한 경남 고등경찰 3총사(부산의 하형사, 진주의 강형사, 마산의 박헌병)으로 꼽힌 것은 물론 '고문귀'(고문 귀신)가 그의 별명이었을 정도였다. 오늘날 '고문 경찰'의 대명사가 된 자가 이근안이라면, 일제강점기 최고의 고문 경찰은 바로 '하판락'인 것이다.

하판락이 이같은 악명을 얻게 된 계기는 1942년 9월 평안남도를 중심으로 신사 참배를 거부한 기독교인 70여 명을 검거하고 집단 고문한 끝에 투옥하면서부터였다. 당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고문당한 진주 배돈병원장 김준기(1913~?)가 1994년에 출판한 회고록 '의학의 길목에서'에 나온 바에 의하면, 하판락은 본인 역시 한국인이면서도 '조센징' 운운하며 심한 고문을 가했다고 한다. 이에 김준기는 "같은 동족의 몸에 그렇게도 심한 고문을 할 수 있었던 그의 행동에 대해 나는 심한 분노와 슬픔을 느꼈다. 차라리 그것은 비극이었다."며 분개했다. 이듬해인 1943년 10월에는 경상남도 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반일투사를 색출해 탄압에 앞장섰다.

그런데 더욱 기가 막힌 것은 따로 있었다. 그가 한 고문 행위가 얼마나 극악했던가에 대한 또다른 독립운동가의 고발이었다. 하판락이 경상남도경찰부 고등과 경부보로 재직 중이던 1943년 3월에 일제의 침략전쟁 방해와 조선독립을 목적으로 1942년 5월에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군사시설 및 군수공장을 파괴하고 항일전단을 살포하며 군자금 모집을 계획 중이던 이른바 '친우회 불온 전단사건'으로 검거된 이광우 등 천우회 회원 3명과 여경수 등까지 합해 7~8명을 고문한 사건이었다. 참고로 여경수 등은 그로부터 1주일 전에 '울산 부산 마르크스 레닌 연맹'에 연루되어 체포되었는데, 하판락은 사회주의자들의 항일훈동을 친우회 활동과 엮어 '청소년들도 사회주의 운동이 가담했다. 기성 사회주의자들이 청소년들까지 포섭하여 불온 전단을 살포토록 사주했다.'고 날조하며 이들을 고문했다.

당시 하판락은 독립투사 여경수(呂敬守, 1912?~1945)에게 자백을 강요하면서 그가 거듭 부인하자 온몸을 화롯불에 달궈진 쇠젓가락으로 지졌으며, 그리고 이어진 구타, 전기고문, 물고문, 머리카락 뽑기, 손가락 비틀기, 압슬 고문 끝에 여경수는 3년 후, 즉 해방 직전에 고문 후유증으로 감옥에서 끝내 벗어나지 못한 채 하나뿐인 목숨을 잃었다. 참고로 하판락은 고문 당시 만 17세의 청소년이라 몸에 되도록 열상 자국을 남기지 않게 한다고? 이광우에게 고춧가루 물고문을 가했다고 하며, 그렇게 이광우는 무려 10개월 동안 고문을 당했으며, 광복으로 석방된 후 몸을 추스리는 데에만 1년이 걸렸다고 한다.

또한 그나마 살아남은 이광우 선생을 비롯한 같은 사건 관련자의 운명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판락의 잔혹한 고문 때문에 모두 신체 불구자가 된 것. 실제로 이광우는 고문 후유증으로 다리근육이 파열되어 30대 초반부터 다리를 절게 되었으며, 심지어 이렇게 고문받아 만신창이가 된 그들은 이후 재판에 넘겨져 4년 이상의 감옥 생활을 또 겪어야 했다. 한편 이러한 잔혹한 고문 덕에 하판락은 더 높은 자리로 승진했다.



하지만 이같은 죄상이 '하판락의 모든 것'이 아니었다. 독립운동가에게 자백을 강요하며 하판락이 자행한 이른바 '착혈 고문'이 그것이었다.

지난 2007년 사망한 독립운동가 이광우 선생의 증언을 통해 세상에 알려지게 된 하판락의 고문 행위는 인간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참혹했다. 이광우 선생은 "고문을 당하는 것보다 더 끔찍한 일은 내가 고문당할 순서를 기다리는 것과 또 하나는 다른 이가 고문당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이광우 선생은 하판락이 가한 '착혈 고문'을 고발했다.

1943년, 하판락은 당시 사상운동 조직 사건으로 체포되어 온 이미경 등을 고문했다. 어떻게 고문했나면, 자신이 원하는 대로 진술하지 않는 이미경의 팔 여기저기에 주사기를 삽입한 후, 혈관을 찾으면 주사기 한가득 피를 뽑아낸 하판락은 다시 그 피를 고문 피해자인 이미경을 향해 뿌린 것. 그리고는 다시 물었고, 거부하면 또 주사기로 착혈한 후 고문 피해자의 얼굴이나 몸, 벽에 피를 뿌리는 행위를 반복했다. 이것이 바로 '착혈 고문'.





해방이 되었음에도 친일 경찰 하판락은 '오히려' 더욱 잘 나갔다. 해방 후에도 하판락은 미 군정의 '일제 관리 재등용 정책'에 따라 여전히 경찰로 근무했다. 그러면서 그는 미군정 제7경찰청 회계실 주임으로 일하며 일본인 적산 재산 처리에 관여하며 더 많은 부를 축적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1946년 6월에는 경남 경찰청 수사과 차석으로 승진해 일제 고등경찰 '하 형사'로서의 '실력'을 발휘했으며, 이후 경찰직을 그만두고 미군정 도경찰부에서 회계업무를 본 경험을 바탕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그러한 하판락에게 잠시나마 역사적 단죄가 찾아온 것은 1949년이었다. 하판락의 고문으로 순국한 독립투사 여경수의 어머니가 그를 고발하여 부산에서 반민특위에게 1949년 1월 24일에 체포되어 마포형무소에 구금된 것. 1949년 당시 고원섭이 쓴 <반민자 죄상기>에 따르면, 하판락을 체포한 반민특위가 그를 서울로 압송하려 하자 부산 시민들이 당장 여기서 우리들이 처리하겠으니 맡겨 달라며 애원했을 정도로 하판락에 대한 분노가 충천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판락이 체포되자 이광우는 자신의 항일활동과 하판락의 고문 사실 등에 대한 조서를 보내고는 반민특위로부터 증인 소환장을 발부받자, 하판락의 아버지는 뻔뻔하게도 이광우의 생가를 찾아가 보자기로 싼 돈 보따리를 건네며 이광우의 아버지에게 '당신 아들이 하판락을 모른다고만 해 달라'는 요구까지 했다고 한다. 당연히 이광우의 아버지는 이 뻔뻔한 요구를 거부했고, 이광우도 이 소식을 듣고는 매우 격분했으며, 체포된 하판락을 만나러 갔을 때 주먹다짐을 하며 싸우기도 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서울로 압송된 하판락은 반민특위로부터 강도 높은 조사를 받았으나, 하판락은 자신이 저지른 독립투사 살해 및 착혈 고문 사실 등을 끝끝내 부인했다. 그러다가 1949년 6월 6일 이승만의 사주를 받은 친일 경찰이 반민특위 사무실을 습격하는 사건이 발생한 후, 반민특위가 사실상 무력화되면서 결국 하판락은 1949년 8월 26일에 병보석으로 석방되었다.

이후 하판락은 자신의 모교인 진주고등학교 초대 동창회 감사를 지낸 것을 시작으로 1956년 경남도의원 선거에 하판락은 고향인 명석면으로 돌아와 진양군 제1선거구에서 여당인 자유당 후보로 출마했지만, 당시 막강한 하씨 문중의 영향력과 금품살포를 동원한 선거운동에도 불구하고 면민들과 유권자들은 그를 낙선시켰다. 이후 부산시의원에 도전했으나, 이마저도 실패했다.

결국 그는 일제강점기부터 형성한 재력을 가지고 금융업자로 변신, 신용금고를 설립하고 목재사업도 병행하며 엄청나게 많은 돈을 모았고 기업체를 운영하는 사업가로 자리잡았다. 이 돈으로 고향에 기금을 희사하거나 기부금을 내는 등 생색을 냈고, 부산에서는 대한노인회 수영구 지회장을 수차례 역임하고는 1999년 어버이날에 부산시장에게서 표창을 받는 등 노인복지 공로자로 신분세탁을 제대로 했다. 이렇게 하판락은 무려 반세기 가까이 과거의 악행이 크게 공론화되지 않은 채 부귀영화를 누렸다.





하지만 하판락의 친일 행적은 독립투사 이광우의 아들 이상국의 노력과 이광우의 증언으로 다시 한 번 까발려지게 되었다. 이상국은 아버지의 독립운동 노력을 인정받기 위해 노력했으나 10년 동안 제대로 된 기록을 찾지 못했던 상황에서 우연히 하판락을 알게 되었고, 이에 1999년 10월에 KBS 기자들과 함께 하판락의 집을 찾아갔다. 하판락은 이광우를 체포했다는 것만은 인정했으나, 이광우에게 가한 고문에 대해 '나는 고문을 지시했을 뿐, 직접 고문한 것은 내 부하인 김소복이었다.'는 거짓말을 했으나, 이 증언으로 인해 역설적으로 반민특위에 체포되었던 기사와 이광우의 반민특위 증인 출두 서류와 함께 아버지의 독립운동 공적을 입증할 결정적 근거가 된 셈이다.

그리고 하판락은 전직 친일경찰로서 뉴스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으며, 이광우 선생이 정부로부터 독립유공자로 인정되고 2000년 8월 15일에 건국훈장 애족상을 받으면서 하판락의 평판은 다시 한 번 추락했다. 친일 죄상과 고문 사실이 재조명되면서 국민적인 공분과 비난 여론이 불같이 타오르자, 하판락은 2000년 1월 17일 정운현 대한매일 기자와의 인터뷰를 통해 "일경의 간부를 지낸 과거 일을 부끄럽게 생각하며, 나로 인해 피해를 본 분들에게 사과하고 용서를 빈다"며 마지못해 잘못을 시인했다.

한편 2000년 12월에 하판락의 고향 명석면에서 발간된 <명석면사>에서 이 자의 집안인 진주 하씨 문중의 반발로 하판락의 친일 죄상이 모조리 삭제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명석면사를 쓴 김경현이 밝힌 바로는, 하씨 문중이 마을회관으로 자신을 불러서는 "무슨 근거로 그렇게 썼냐. 근거를 대라.", "하판락은 단지 경찰이었다. 고등계 형사가 아니다.", "광주 놈이라 경상도를 저렇게 쓴다.", "외지인 주제에 지역사정을 뭘 안다고 그렇게 막 쓰냐."는 등의 망언과 비난을 해댔다고 한다. 결국 <명석면사>에서 하판락에 대한 내용은 삭제되었지만, 김경현은 편찬 후기에 명석면 출신자 중에 반민특위 관련자에 대해서는 면사편찬위의 결의로 삭제했다.라고 적어 시간차 공격을 날렸다. 진주 하씨 일동은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는 펄펄 뛰었지만, 책은 이미 인쇄가 끝난 뒤였다.

이후 하판락은 당연히 2002년 2월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 모임'에서 친일파 708인 명단에 들어갔는데, 하판락은 이 명단을 발표할 당시에 명단에 든 대상자 중 유일하게 생존한 인물이었다. 하판락은 2002년 3월 10일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 '53년만의 증언, 친일경찰 노덕술' 편에서도 얼굴을 비췄고, 이후 2003년 9월 11일에 향년 91세의 천수를 누리며 살다가 죽었다. 2009년에는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2023년 3월 2일에 방송한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68회의 중심 인물로 등장한다.